My Favorite Music/^^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브람스/피아노 협주곡 1번 Op. 15 - 아르투르 슈나벨(피아노) 죠지 셀(지휘)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로만짜 2016. 9. 11. 01:00

 

 

 

 

 

 

 

 

  

 

Johannes Brahms (1833~1897)
Piano Concerto No. 1 in D minor, Op. 15

 

 

 

  1. Maestoso (20'47")  

 

  2. Adagio (15'50")  

 

  3. Rondo - Allegro non troppo (10'30")

   

1 ~ 3 순으로 연속듣기
 
 
Artur Schnabel, piano
George Szell, cond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Recorded in January 1938 Mono
Abbey Road Studio No.1, London
 
 
 
 
 
브람스는 이 곡을 1854년, 그의 나이 21세 때인 봄에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완성해 놓고
빌표를 미루고 있다가 그해 여름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였다.

이때의 의도는 교향곡 1번으로 고쳐 쓰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게획을 수정 하게 된다.
1854년 2월은 슈만이 정신착란으로 라인강에 투신한 해였다.

1855년 2월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불행한 교항곡은 협주곡으로 사용됐습니다."
결과적으로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중에서
피아노 협주곡으로 채택된 악장은 1악장 뿐이었다.

2,3악장은 1856년이 저물어 갈즈음에 전혀 새로운것으로 만들어 졌다.
"2악장은 나는 당신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라고
브람스가 클라라 슈만에게 고백한 간접적인 사랑고백이다.

청년 브람스의 분출하는 정열이 넘치는 듯
두번의 카덴짜가 허락되는 것도 이해할만하다.
브람스가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 작곡에 전념한
시기는 1856년 부터 1858년 까지 2년 간이다.

초연은 5년여간에 걸친 작곡 및 수정을 마쳐 완성,
1859년 하노버 궁정극장에서 브람스 자신의 연주와
요하임(Joachim)의 지휘로 이루어졌으나 반응이
그리 좋지 않은 것에 대해 상당히 실망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청중들의 기호는 쇼팽이나 리스트 같은 작곡가들이 작곡한
낭만적 성향이 가득한 피아노 협주곡들에 이미 맞추어져 있어서,
브람스의 1번 피아노 협주곡 처럼 피아노의 역할이 축소되고
오케스트라의 비중이 강화된 곡에는 전적인 찬사를 보내지 못했다고 한다.

브람스가 이 대곡을 작곡한 시기는 그의 스승이자 
후원자였던 슈만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

브람스에게 정신적인 지주와도 같았던 슈만의 죽음(1856년)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1번 협주곡에 브람스가
이 곡을 작곡할 당시의 심정이 잘 반영된 것이다.  
 
 
 
아르투르 슈나벨은 1882년 폴란드의 리프니크(Lipnik)에서
출생한 오스트리아계의 미국 피아니스트이다.
베토벤 연주가로서 한 시대를 주름잡은 피아니스트로서
베토벤 연주사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대음악가이다.

뿐만 아니라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 빅토르 바빈
등을 가르쳐 후세에까지 그 뛰어난
연주의 혈맥을 이어준 공적은 아주 크다.

슈나벨은 전성기 때부터 베토벤의 귄위자로 이름이 높았는데,
세계 최초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녹음한 것도 그였으며,
1927년 베토벤 서거100주기 기념 공연에서는
32개의 소나타를 연속 연주해서 대단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아놀드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Pierrot Lunaire, Op.21'을
초연하기도 했던 슈나벨은 1925년부터 30년까지 5년동안
베를린 음악 학교의 교수로서 클리포드 커즌(Clifford Curzon)이나
페터 프랑클(Peter Frankl) 같은 명피아니스트를 길러내지만
나치가 정권을 잡자 독일을 떠나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연주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미국 무대에서는 그의 레퍼토리가 미국인들의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럽에서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전쟁이 끝나자 스위스로 거처를 옮겼으며,
195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녹음과 연주 활동을 병행했다.

레퍼토리는 그렇게 많지 않아서 베토벤 이외에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가 거의 전부였고
독일계 작곡가의 작품이외에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작은  
레퍼토리 가운데서도 그가 연주하는 모든 곡은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호로비츠처럼 외향적인 일면이 있다거나 박하우스처럼
엄격한 분위기가 풍기지도 않았지만 한 마디로
중용의 미덕을 한몸에 지닌 피아니스트 였다고 할 수 있다.
<웹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