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디 메뉴인(1916∼1998 )
메뉴인은 미국이 유럽으로 수출한 음악가로서는 초유의
인물이다.
뉴욕에서 유태인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7세 때 처음
으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8세 때 독주회를 가진 당대의
대표적인 ‘신동’이었다.
그는 요즘으로 치자면 ‘영재교육’을 위해 9세의 나이로
에네스쿠 밑에서 배우기 위해 파리로 유학했다.
하지만 유럽에서도 그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예사롭지
않았다.
지금의 ‘신동’들에게 보내는 반응보다 더욱 열광적인
것이었다 전한다.
이러한 ‘신동 신드롬‘은 물론 나이에 걸맞지 않는 완벽한
기교와 성숙한 음악적 표현력이 바탕이 된 것이었지만,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메뉴인의 유년기의 신체 성장속도가
다른 아이들보다 느렸다는 점이다.
10세 때도 아직 ‘꼬마’로밖에 안 보였고,
10대 중반까지도 귀공자의 이미지를 간직했던 그다.
1932년 엘가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녹음했다.
그리고 그는 인기절정에서 20대를 맞이했다.
그의 ‘신동 신드롬’은 약효가 떨어져 갔고 1940년대
초반에는 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500회 이상의 전시 위문공연과 첫 아내와의 결별 등이
겹치며 메뉴인은 심각한 상태까지 갔으나 디아길레프
발레단의 프리마 돈나 다이아나와의 재혼으로 안정을
찾아갔다.
전후 푸르트벵글러 지휘의 베를린 필과의 인연으로 그는
다시 솔리스트로서도 정상을 찾아갔다.
당시의 녹음인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emi)은
명반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그는 바이올린에 머무르지 못했다.
‘신동시대’ 이후 그의 연주는 다른 대가급 연주가들과
비교해 약간 낮은 수준에서 연주 평균점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메뉴인 자신도 이를 자각한 듯 자꾸 다른 분야로 관심을
돌리려 했고, 한때 그는 비올라를 연주하기도 했다.
60년대 들어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됐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지나친 자학이었고, 때이른 포기였다.
그가 바이올리니스트로 남긴 레코딩 유산만도 엄청난
것이었고, 하이페츠도 이미 한물가기 시작한 입장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그는 순도 높은 스타일로 해석의
깊이와 힘을 느끼게 하는 연주를 들려주었었다.
지휘 분야에서 확실한 돌파구를 찾으려던 그는 점차 지휘
횟수를 늘려갔으나 이 분야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젊은 음악가들과의 교류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는, 타고난
음악교사로서의 자질을 살리며 돌파구를 찾았다.
1963년에 메뉴인 음악학교를 설립해 교육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또한 세계의 민속음악을 서구의 청중들에게 전하는 물꼬를
튼 것도 그였다.
시타르의 달인, 라비 샹카르의 인도음악에 탐닉한 나머지
그는 요가수행법을 배웠다.
82년의 베를린 필 1백주년 기념 연주회의 지휘대에 선
그는 물구나무서기를 한 채 ‘요가 지휘’를 선보이기도 했다.
얼마 전 타계한 재즈 바이올린계의 명인, 스테판 그라펠리
와의 공동작업에 의한 레코딩 역시 선구적 크로스오버로
기록됐다.
메뉴인은 최근에는 로열 필하모닉의 명예지휘자로서
세계에 음악을 전파하는 ‘음악전도사’로서도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95년 가을 내한했을 당시 지휘자로서의 모습을
선보이기도 한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