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빛낸 10인의 바이올리니스트
KBS 1FM에서 2006년 4월에 시리즈로 방송한
내용을 정리 편집한 자료 입니다..
7.Nathan Milstein
나탄 밀슈타인(1904∼1992)
밀슈타인의 고향은 러시아의 오데사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같은 곳이다.
이곳은 20세기 초의 위대한 음악가들을 다수 배출했다.
두 사람 외에 길렐스와 체르카스키, 코간 정도라면 이에
대한 이견은 없을 것이다.
밀슈타인도 오이스트라흐와 마찬가지로 오데사
음악원에서 스톨리알스키에게 사사했다.
그리고는 다시 아우어에게 배우러 상트 페테르부르크
로 갔다.
세 살 위인 하이페츠가 이미 와서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이 머문 것은 잠깐일 뿐이다.
하이페츠는 혁명 전에 러시아를 빠져나갔고,
밀슈타인은 혁명 이후에도 남게 되었다.
1920년경 호로비츠를 만났다.
호로비츠가 그의 공연을 보러 찾아왔던 것이다.
동갑내기였던 두 사람은 그로부터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켜나갔다.
1925년, 둘은 함께 묶여 정책적으로 서방에 소개되었다.
이로써 이들은 스탈린의 철권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첼로의 피아티고르스키도 합류했다.
밀슈타인이 서방으로 망명해 연주활동을 시작할 당시
하이페츠는 이미 자리를 확고히 잡고 센세이션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태양과 같은 그의 강렬한 빛에 엘만, 후베르만, 시게티,
티보, 부쉬 등의 1등성들조차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원로인 크라이슬러와 신성인 메뉴인만이 어느 정도
버티고 있었다.
하물며 밀슈타인 같은 햇병아리 바이올리니스트야
두말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 기교로서 하이페츠에 대적할 수 있는
것은 밀슈타인이 유일했다.
1929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미국 데뷔공연을 가진
후 이듬해 미국에 귀화했다.
미국에서 그는 이미지를 바꿀 수 있었다.
파가니니뿐만 아니라 바흐의 전문가로도 인식되기
시작했다.
기교와 음악성을 모두 갖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인식
변화였다.
그리고 점점 파가니니의 이미지는 엷어져 가고 바흐만이
남게 되었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dg)는 두 번의 녹음이 있는데, 그중 나중에 한 70년대 것이 원숙미가
돋보인다.
밀슈타인은 20세기 초, 러시아가 낳은 바이올리니스트,
아니 위대한 예술가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연주했고 또
살아남았다.
물론 슈라 체르카스키가 조금 더 오래 연주, 생존했지만
그는 연주활동에 기복이 심했고, 밀슈타인보다 6년이나
연하였다.
밀슈타인도 체르카스키도 세상을 떠난 지금, 20세기
초의 러시아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모두 전설로 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