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프리츠 크라이슬러 (1875~1962)
크라이슬러’라 하면 왠지 ‘아주 옛날 사람’이란 느낌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클래식을 모르는 사람들도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크라이슬러 작곡의 ‘사랑의 기쁨’이나 ‘사랑의 슬픔’은 너무나 낭만적이고 분위기 있는 소품들이라 그가 도무지 20세기의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분명히 19세기에 26년을 살았고,
20세기에 61년을 살았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그의 선천적인 ‘빈 기질’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역시 신동이던 그는 7세의 나이로 빈 음악원에 최연소 입학해 헬메스베르거에게 바이올린을, 브루크너에게 이론을 배웠다.
10세 때 파리 음악원으로 옮겨 마사르에게 바이올린을,
들리브에게 작곡을 배운 그는 12세의 나이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게 되었다.
이듬해 미국 순회 공연을 갖고 돌아와 그로부터 약 10년간은 의학을 공부하고, 군 복무도 하느라 음악과 잠시 멀어졌다.
1898년 빈 필에 입단했고, 이듬해 니키쉬 지휘의 빈 필과
협연해 성공을 거둔 후, 50년 가까이 당대 최고의 스타
연주가의 지위를 누렸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참전했다 부상당하기도 했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조짐이 보이자 치를 떨며 미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교통사고로 시력과 청력이 약해지는
불행을 당했다.
하지만 1947년 카네기홀 은퇴 연주회로 무대에서 물러날
때까지 성실히 연주에 임했다.
그의 스타일은 지금 들어보면 너무나 고풍스런 것이다.
이미 1백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탓이다.
그의 가장 기교적인 작품에 쓰인 어려운 기교들도
사라사테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과정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위에서 소개한 대로 크라이슬러가 하이페츠를 처음 대면한
것은 1912년이다.
당시 함께 자리했던 짐발리스트는 크라이슬러의 농담이
진담이 되어 ‘하이페츠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태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크라이슬러는 전쟁중에 부상당하면서도 연주가로
살아남았다.
이는 크라이슬러도 젊은 시절 만만찮은 기교파였음을
증명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가 무대 위에서 청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와 매력이 남달랐다는 점이다.
1947년 은퇴한 후로도 따뜻한 인품으로 친근감을 주는
명사로서 오랫동안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은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그가 19세기 빈 풍의 전인적 인간형으로 교양인이자
신사였다는 점은 덧붙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가 비록 소품일지언정 작곡을 했다는 것도 하이페츠에
대한 열등감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패였을 것이다.
월간 객석에서 발췌.....
프리츠 크라이슬러
바흐...파르티타 제3번 E장조 BWV 1006 1. 전주곡 -
유진 오먼디(지휘) 필라델피아 Orch
Fritz Kreisler (1875-1962)
Praeludium and Allegro(서주와 알레그로)(6:17)
Gerhard Taschner, violin
Martin Krause, piano
아름다운 로즈마린 Vil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