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avorite Music/^^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브람스/피아노 협주곡 1번 Op. 15 - 에밀 길렐스(피아노) 오이겐 요훔(지휘) 베를린 필하모니카

로만짜 2016. 9. 23. 01:28

 

 

 

 

 

 

 

 

 

 

Johannes Brahms (1833~1897)
Piano Concerto No. 1 in D minor, Op. 15

 
 


1. Maestoso
2. Adagio
3. Rondo - Allegro non troppo
 

 
  
Emil Gilels, piano
Eugen Jochum, cond
Berliner Philharmoniker
Recorded: 1974/6 Stereo, Analog
Jesus-Christus-Kirche, Berlin

 

 

브람스는 이 곡을 1854년, 그의 나이 21세 때인 봄에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완성해 놓고
빌표를 미루고 있다가 그해 여름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였다.

이때의 의도는 교향곡 1번으로 고쳐 쓰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게획을 수정 하게 된다.
1854년 2월은 슈만이 정신착란으로 라인강에 투신한 해였다.

1855년 2월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불행한 교항곡은 협주곡으로 사용됐습니다."
결과적으로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중에서
피아노 협주곡으로 채택된 악장은 1악장 뿐이었다.

2,3악장은 1856년이 저물어 갈즈음에 전혀 새로운것으로 만들어 졌다.
"2악장은 나는 당신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라고
브람스가 클라라 슈만에게 고백한 간접적인 사랑고백이다.

청년 브람스의 분출하는 정열이 넘치는 듯
두번의 카덴짜가 허락되는 것도 이해할만하다.
브람스가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 작곡에 전념한
시기는 1856년 부터 1858년 까지 2년 간이다.

초연은 5년여간에 걸친 작곡 및 수정을 마쳐 완성,
1859년 하노버 궁정극장에서 브람스 자신의 연주와
요하임(Joachim)의 지휘로 이루어졌으나 반응이
그리 좋지 않은 것에 대해 상당히 실망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청중들의 기호는 쇼팽이나 리스트 같은 작곡가들이 작곡한
낭만적 성향이 가득한 피아노 협주곡들에 이미 맞추어져 있어서,
브람스의 1번 피아노 협주곡 처럼 피아노의 역할이 축소되고
오케스트라의 비중이 강화된 곡에는 전적인 찬사를 보내지 못했다고 한다.

브람스가 이 대곡을 작곡한 시기는 그의 스승이자 
후원자였던 슈만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

브람스에게 정신적인 지주와도 같았던 슈만의 죽음(1856년)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1번 협주곡에 브람스가
이 곡을 작곡할 당시의 심정이 잘 반영된 것이다.

 

 
 
 
'강철의 타건, 철의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1916년 10월19일~1985년 10월14일)를 말한다.
힘과 테크닉을 겸비한 대표적인 구소련 출신의
피아니스트에겐 아주 적절한 닉네임이었다.

실제로 연주도중 강철과 같은 타건(건반을 두드리는 행위)으로
피아노의 현이 자주 끊어졌다. 힘만이 아니라 기교도 출중했다.
역대 최고 연주자 대열에 있는 이유다.

소련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길렐스는 1916년 예술의 도시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오데사는 지금은 우크라이나 땅이지만
냉전시대에는 구소련의 중요한 무역항이었다.

‘흑해의 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로서
세계적 음악인들을 많이 배출했다.
바이올린의 오이스트라흐와 피아니스트 리흐터가 모두 동향인이다.

길렐스까지 세 사람 모두가 망명하지 않았고,
조국을 버리지 않은 것도 특징이다.
이들은 정치와 무관하게 음악 속에 묻혀 살았다.
그러나 소련은 이들을 문화상품으로 내놓아
사회주의 체제하의 문화적 우월감을 세계에 과시했다.

부모가 모두 음악가였던 길렐스는 5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1929년(13세) 최초의 공개 리사이틀을 열었다.
오데사음악원을 거쳐 1933년(17세) 제1회 전소련 음악 콩쿠르에서
1등상으로 주목받았으나, 다시 2년 동안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명교수 네이가우스의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더 한층 수련을 쌓았다.

이때 레코딩한 음반이 모스크바상을 받았다. 1936년 빈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부터 세계의 주목을 받았는데, 뉴욕타임스는
“그의 이름은 전 세계에 천둥처럼 울려퍼질 것”이라고 극찬했다.

1938년(22세)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국제콩쿠르
(현 엘리자베스 여왕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는
20세기를 이끌 차세대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았다. 2차 세계대전 후
1945년에 레닌 상을 받고 이후 10년간 국외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 10년 중 그의 주가는 더 높아졌다.
그는 서방활동을 재개한 1954년(38세) 파리 데뷔를 
시작으로 한 연주여행에서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인 1955년 소련 연주가로서는 최초로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미국을 방문, '최대의 비르투오조'라는 찬사를 받았다.
피협 2번에 계속
< 웹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