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annes Brahms (1833~1897)
Eugen Jochum, cond Berliner Philharmoniker Recorded: 1974/6 Stereo, Analog Jesus-Christus-Kirche, Berlin
브람스는 이 곡을 1854년, 그의 나이 21세 때인 봄에
에밀 길렐스(1916년 10월19일~1985년 10월14일)를 말한다. 힘과 테크닉을 겸비한 대표적인 구소련 출신의 피아니스트에겐 아주 적절한 닉네임이었다. 실제로 연주도중 강철과 같은 타건(건반을 두드리는 행위)으로 피아노의 현이 자주 끊어졌다. 힘만이 아니라 기교도 출중했다. 역대 최고 연주자 대열에 있는 이유다. 소련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길렐스는 1916년 예술의 도시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오데사는 지금은 우크라이나 땅이지만 냉전시대에는 구소련의 중요한 무역항이었다. ‘흑해의 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로서 세계적 음악인들을 많이 배출했다. 바이올린의 오이스트라흐와 피아니스트 리흐터가 모두 동향인이다. 길렐스까지 세 사람 모두가 망명하지 않았고, 조국을 버리지 않은 것도 특징이다. 이들은 정치와 무관하게 음악 속에 묻혀 살았다. 그러나 소련은 이들을 문화상품으로 내놓아 사회주의 체제하의 문화적 우월감을 세계에 과시했다. 부모가 모두 음악가였던 길렐스는 5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1929년(13세) 최초의 공개 리사이틀을 열었다. 오데사음악원을 거쳐 1933년(17세) 제1회 전소련 음악 콩쿠르에서 1등상으로 주목받았으나, 다시 2년 동안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명교수 네이가우스의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더 한층 수련을 쌓았다. 이때 레코딩한 음반이 모스크바상을 받았다. 1936년 빈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부터 세계의 주목을 받았는데, 뉴욕타임스는 “그의 이름은 전 세계에 천둥처럼 울려퍼질 것”이라고 극찬했다. 1938년(22세)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국제콩쿠르 (현 엘리자베스 여왕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는 20세기를 이끌 차세대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았다. 2차 세계대전 후 1945년에 레닌 상을 받고 이후 10년간 국외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 10년 중 그의 주가는 더 높아졌다. 그는 서방활동을 재개한 1954년(38세) 파리 데뷔를 시작으로 한 연주여행에서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인 1955년 소련 연주가로서는 최초로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미국을 방문, '최대의 비르투오조'라는 찬사를 받았다. 피협 2번에 계속 < 웹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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