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V. Beethoven (1770~1827) Symphony No.5 in C minor Op. 67 'Fate'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에리히 클라이버 (1890~1956)는 언어 학자인 부친이 프라하로 부임되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프라하에서 보냈는데, 1895년과 그 이듬해에 양친을 다 잃고 나서는 프라하와 빈의 친척 집에서 자랐다. 빈에서는 기초 교육 종료 시험을 받고 프라하 음악원에서 피아노, 오르간, 타악기, 지휘법을 공부하고, 그곳 대학에서 철학, 역사, 예술사를 배웠다.
1911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 프라하의 도이치 극장의 연습 합창 지휘자가 된 것이 음악 활동의 시작인데, 그로부터 1919년까지는 다름슈타트의 궁정 오페라 극장의 제3 및 제2(1916년 이후)악장이 되었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는 바르멘 - 엘버펠트(현 부퍼탈)의 제1악장이 되고, 이 시기에 콘서트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그로부터 뒤셀도르프, 만하임의 지휘자를 역임한 다음 1923년 8월에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으로 취임하고 1934년 12월에 나치스의 문화 정책에 반대하여 사임할 때까지 이 지위에 있으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이 사이에 야나체크의 '예누파', 베르크의 '보체크' 등 그 밖의 초연도 하였고,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를 위하여 두 번 미국에 갔다.
1935년 1월에 나치스를 피해 독일을 떠났고, 이듬해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극장의 독일 오페라의 수석 지휘자, 1943년부터 1947년까지 하바나 필하모니의 지휘자 및 중남미 각지의 객원 지휘 등을 하였다. 1947년부터 유럽으로 진출하였으며,
1951년부터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객원 지휘에 초청되었고 1954년에 수석 지휘자가 되었지만, 정치적 이유 때문에 1955년 3월 사임하였다. 그 후 각지에서 객원 지휘를 계속하였으며, 1956년 1월 27일에 취리히에서 사망하였다.
클라이버는 언어의 리듬과 오페라의 연출 효과에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뛰어난 감각을 갖추고 있었다. 이로 인해 오페라 지휘에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으며,
그러한 양식을 콘서트 지휘에까지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음악은 항상 노래하고 있는 것이 큰 특색인데, 그래서 형식과 내용의 균형이 교묘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전곡과 베토벤 운명 교향곡이 명반이라 할 수 있다. 1974년 그의 아들 카를로스 클라이버도 베토벤 운명 교향곡을 내놓았는데,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반으로 손꼽힌다. <웹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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