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지휘자)/^^에리히 클라이버

베토벤/교향곡 5번 Op. 67 '운명' - 에리히 클라이버(지휘) &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로만짜 2014. 8. 7. 00:30

 

 

 

 

 

 

   
 

 

 

L. V. Beethoven (1770~1827)
Symphony No.5 in
C minor  Op. 67 'Fate'

 

 

   I.  Allegro con brio (07'17")

 

   II.  Andante con moto (09'18")

 
 

Bruno Walter, Arturo Toscanini, Erich Kleiber,
Otto Klemperer, Wilhelm Furtwangler, Berlin, in.1929

 

 

   III.  Allegro (05'20")

 

   IV.  Allegro - Presto (09'32")

  
 
 
Erich Kleiber, cond
Concertgebouw Orchestra Amsterdam
1953, Mono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에리히 클라이버 (1890~1956)는
언어 학자인 부친이 프라하로 부임되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프라하에서 보냈는데,
1895년과 그 이듬해에 양친을 다 잃고 나서는 프라하와 빈의 친척 집에서 자랐다.
빈에서는 기초 교육 종료 시험을 받고 프라하 음악원에서 피아노, 오르간, 타악기,
지휘법을 공부하고, 그곳 대학에서 철학, 역사, 예술사를 배웠다.

1911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 프라하의 도이치 극장의
연습 합창 지휘자가 된 것이 음악 활동의 시작인데,
그로부터 1919년까지는 다름슈타트의 궁정 오페라 극장의
제3 및 제2(1916년 이후)악장이 되었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는 바르멘 - 엘버펠트(현 부퍼탈)의 제1악장이 되고,
이 시기에 콘서트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그로부터 뒤셀도르프, 만하임의 지휘자를 역임한 다음
1923년 8월에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으로 취임하고
1934년 12월에 나치스의 문화 정책에 반대하여 사임할 때까지
이 지위에 있으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이 사이에 야나체크의 '예누파', 베르크의 '보체크' 등 그 밖의 초연도 하였고,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를 위하여 두 번 미국에 갔다

1935년 1월에 나치스를 피해 독일을 떠났고,
이듬해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극장의 독일 오페라의 수석 지휘자,
1943년부터 1947년까지 하바나 필하모니의 지휘자 및 중남미 각지의
객원 지휘 등을 하였다. 1947년부터 유럽으로 진출하였으며,
1951년부터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객원 지휘에 초청되었고
1954년에 수석 지휘자가 되었지만, 정치적 이유 때문에 1955년 3월 사임하였다.
그 후 각지에서 객원 지휘를 계속하였으며,
1956년 1월 27일에 취리히에서 사망하였다.

클라이버는 언어의 리듬과 오페라의 연출 효과에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뛰어난 감각을 갖추고 있었다.
이로 인해 오페라 지휘에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으며,
그러한 양식을 콘서트 지휘에까지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음악은 항상 노래하고 있는 것이 큰 특색인데,
그래서 형식과 내용의 균형이 교묘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전곡과 베토벤 운명 교향곡이 명반이라 할 수 있다.
1974년 그의 아들 카를로스 클라이버도 베토벤 운명 교향곡을 내놓았는데,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반으로 손꼽힌다.
<웹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