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지휘자)/^^에리히 클라이버

베토벤/교향곡 3번 Op. 55 '영웅' - 에리히 클라이버(지휘) & 암스텔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로만짜 2016. 6. 24. 00:08

 

 

 

 

 

 

 

 

  

 

L.V. Beethoven (1770~1827)
Symphony No. 3 in E flat major, Op. 55 'Eroica'

 

 

 

  1. Allegro con brio (14'01")  

 

  2. Marcia funebre.
                            Adagio assai (C minor) (15'28")

  3. Scherzo. 
                            Allegro vivace – Trio (05'33")

  4. Finale. Allegro molto (11'13") 

 

 

1 ~ 4 순으로 연속듣기
 
 
Erich Kleiber, cond
Concertgebouw Orchestra of Amsterdam
Recorded: May 1950 Mono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의 영향이 엿보이는 제1번 이나 제2번과는 달리
제3번 부터는 음악적으로 일대 비약을 보여준다.

즉 규모가 엄청나게 방대해졌고 독창적인 수법이 대담하게 구사되어
베토벤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1악장의 길이만 하더라도 종전 교향곡의 전곡과 거의 맞먹는다
또 제2악장에 장송행진곡을 사용했다던가
종악장에 장대하고도 호화장려한 변주곡을 넣은 것 따위는
당시로서는 커다란 모험이었다.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던 베토벤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는 곡이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의 혁명에서는 코르시카 섬 출신의 일개 포병 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이 반란을 평정하고 국내 최고 사령관 이 되었다.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유의 정신에 불타 있던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을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플라톤의 '공화국'을 숙독한 바 있었던 베토벤은 이 시대의 영웅의 자태를 보여준
나폴레옹을 자신의 작품으로 찬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33세 때인 1803년 여름 이 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하여
1804년 봄에 완성시켰다. 스코어의 표지에는 '보나파르트'라고 썼으며
밑에 자신의 이름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라 적어
이를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내려고 할 무렵,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빈에 퍼졌다.

이 소식에 분개한 베토벤은 그 사본의 표지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저 사나이도 역시 속된 사람이었어. 그 역시 자기의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민중의 권리를 짓 밟고 누구보다도 심한 폭군이 될 것이야." 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이후 다시는 나폴레옹에 대해 언급도 안 했다는 그는 2년 뒤
이 곡을 출 판하면서 '한 사람의 영웅을 회상하기 위해
작곡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17년 후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다는 보도를 듣고
비로소 '나는 그의 결말에 어울리는 적절한 곡을 써 두었다' 라고 했다는 베토벤.
이는 이 작품의 제2악장에 있는 '장송 행진곡'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웹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