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이야기<정준호 선생님>

모차르트와 바이올린

로만짜 2009. 9. 23. 06:17

 

올해로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전세계가 그에 대한 관심과 재조명으로 들끓고 있다. 두말할 나위 없는 천재 작곡가가 서른다섯 해를 살며 작곡한 많은 작품은 콘서트 홀과 오페라 극장, 영화와 상업 광고를 망라하고 끊임없이 연주되고 사랑받는다. 심지어 영유아의 두뇌 발달 교육 프로그램으로까지 각광받고 있는 실정이니, 저작권료를 저 세상에 보내야 한다면 모차르트의 통장이 가장 두둑한 인세로 넘쳐날 것임은 분명하다. 그에 얽힌 많은 재미있는 에피소드 가운데 바이올린에 대한 것을 먼저 소개한다.

모차르트는 걸어다닐 수 있을 때부터 악기를 배웠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어려서부터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유럽에서 널리 알려진 바이올린 교본의 저자였다. 때문에 볼프강 또한 체계적으로 바이올린에 대한 모든 것을 익힐 수 있었다. 전 유럽의 화제를 모으던 어릴 시절의 연주 여행에도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는 꼭 포함되었고, 그 자신도 이 악기를 무척 사랑했다. 모차르트 일가는 1764년 영국 런던을 방문한다. 이때 모차르트가 특히 바이올린에 빠져들게 되는 계기가 있으니 바로 작곡가 토머스 린리(Thomas Linley)와의 만남이다. 린리의 연주와 작품을 들은 모차르트도 처음으로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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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리는 모차르트와 같은 1756년 생으로 당시 둘은 여덟 살의 나이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토머스 린리 시니어 역시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가로서 아들을 가르쳤고, 누나인 엘리자베스 또한 모차르트의 누이 난네를과 마찬가지로 음악에 소질이 있어 뒤에 소프라노 가수가 된다. 린리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요 작곡가였다. 두 소년 작곡가는 금새 친해졌고, 린리는 모차르트에게 바이올린의 매력을 한껏 전해줬다. 이 어린이들이 런던에서 활동하던 바흐의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의 사랑을 담뿍 받았으리라는 사실은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영국이 바로크 시대 이후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이름난 작곡가를 배출하지 못한 콤플렉스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린리가 작곡한 몇 곡을 들어보면 “당시 영국에 이런 작곡가가 있었다니” 하고 놀라게 된다. 그런데 왜 이 뛰어난 작곡가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린리는 아쉽게도 22세 되던 1778년 템즈 강에서 물놀이를 하던 중 익사하고 만다. 영국으로서는 진정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에 앞서 불과 서른여섯에 세상을 떠난 바로크 작곡가 헨리 퍼셀과 이 토마스 린리가 보통 사람만큼만 살 수 있었다면 영국의 음악 지형은 크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토마스 린리라는 작곡가의 이름을 모차르트를 통해서나마 기억하게 된다.
모차르트는 린리가 죽던 해에 만하임과 파리를 연주 여행하며 일곱 곡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한다. 그리고 그는 이 해에 소중한 또 한사람을 잃게 된다. 이번 연주 여행에는 늘 그와 동행하던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함께 떠난다. 그는 늘 집을 떠나 있어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웠던 차이기에 엄한 아버지 대신 어머니와 둘이 함께 가는 이 여행이 너무도 즐거웠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사랑하는 어머니를 파리에서 병으로 잃게 된다. 이를 애도하듯 이 <바이올린 소나타, K304>는 단조로 작곡되었다. 베토벤의 단조 음악은 언제나 슬픈 곡조를 승리의 환희로 전환하려고 애쓰지만 모차르트의 경우는 굳이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슬픔과 애상을 토로한다. 그것이 바로 모차르트의 매력이며, 이 곡에도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사무치듯이, 때론 격정적으로 흘러나온다.
잘츠부르크 시절의 모차르트에게 바이올린 음악을 작곡하게 한 또 다른 인물은 바로 악명 높은 주교인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였다. 그 자신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던 콜로레도에게 - 모차르트에 따르면 끔찍한 실력이었지만 - 연주 여행으로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는 모차르트는 오만방자한 눈엣가시였고, 모차르트도 거만한 꼴불견인 그를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이 죽기만큼 싫었다. 또한 콜로레도 주교는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결코 궁정악장의 지위를 주지 않고, 늘 이탈리아 출신의 연주자 밑에서 부악장으로 일하게 했다. 주교는 1776년 나폴리에서 안토니오 부르네티라는 연주자를 데려와 악장으로 삼았다. 당연히 그를 충실히 섬기던 모차르트 부자에게 이는 썩 기분 좋지 못한 처사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모차르트가 드디어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으로 무대를 옮기게 되는 계기도 바로 부르네티 등과 함께 주교를 수행하며 가진 연주회에서 비롯된 모욕감 때문이다. 그는 이 연주 여행에서 부르네티를 위한 소나타를 작곡해 함께 연주하기도 했으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부르네티는 그의 주인과 그 자신과 악단원 모두에게 흙칠을 하는 자입니다!” 모욕을 주는 주교에게 아첨하는 이 이탈리아 음악가와 함께 일하는 것이 그를 빈으로 떠나도록 부채질했던 것이다. 주교의 명으로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부르네티가 연주하는 것이 그토록 못마땅했는지 그 뒤로 모차르트는 더 이상 이 장르의 곡을 쓰지 않는다.
1781년 마침내 지긋지긋한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에 온 모차르트는 전도 유망한 작곡가로 빠르게 자리잡는다. 흔히 그에게는 역사상 ‘최초의 프리랜서 음악가’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는다. 즉 귀족이나 왕의 궁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작곡만으로 생계를 유지한 첫 작곡가라는 것이다. 이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그는 빈에서 적당한 작곡가로서의 공직을 얻고 싶어했지만 이미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던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텃새가 심했고, 독일인들조차 음악은 오페라든 기악곡이든 ‘이탈리아제(製)’만이 명품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자존심 강한 모차르트는 꼼짝없이 실업자(좋게 말해서 프리랜서이다)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운 좋게 궁정에 자리를 얻었다 해도 자존심 강한 성정 때문에 오래 자리를 보전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빈에서 얻은 첫 일도 공교롭게 바이올린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폰 아우에른하머 가(家)에서 그 집 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친다. 역시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 “아우에른하머씨는 이 세상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의 아내와 레슨을 받아야 하는 딸이었다. 그의 아내는 “천하 제일의 얼간이 바보인 수다쟁이”였고, 딸인 요제피네는 “화가가 악마를 실물인 것처럼 그리려고 생각한다면 이 아가씨의 얼굴에서 도움을 얻을 수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녀에 대한 묘사는 계속된다. “농부의 딸같이 뚱뚱하고, 보면 침을 뱉고 싶을 정도로 땀을 많이 흘리며, 살갗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여길 봐주세요'하고 얼굴에 씌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요제피네는 공공연히 모차르트에 대한 호감을 표했고, 뻔뻔스럽게도 자신이 그와 정혼한 사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이렇게 “정말이지 쳐다보기에 진저리가 나 장님이 되고 싶을 지경”인 요제피네를 위해 모차르트는 여섯 곡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해 주었다. 정말 프리랜서로 먹고살기가 쉬운 노릇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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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하던 모차르트가 진정 뛰어난 바이올린의 대가를 만난 것은 빈에 온지 3년이 지난 1784년의 일이었다. 이탈리아의 만토바 출신인 여성 바이올리니스트 레지나 스트라나자키가 빈에 온 것이다. 그녀는 당대 제일의 음악성을 가진 연주자로 모차르트는 그녀의 연주에 “풍미와 감정이 넘쳐흐르고 있다”고 아버지께 편지한다. 모차르트는 그녀를 위해 바이올린 소나타 K.454를 작곡해 함께 연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 미처 곡을 오선지에 다 적을 수 없었다. 그는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함께 연주하는 합주 부분의 악보만 얼른 적어서 스트리나자키에게 주고 자신이 혼자 연주하는 부분은 머릿속에 있는 대로 보지 않고 연주했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고, 이 곡은 모차르트의 서른 곡이 넘는 바이올린 소나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사랑 받는 작품으로 기억된다.
“머릿속에 이미 다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 천재 작곡가가 가장 즐겨 사용했던 말이자, 주위의 동료들을 언제나 경탄과 좌절에 빠지게 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2006/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