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이야기<정준호 선생님>

브람스의 오페라

로만짜 2009. 9. 23. 06:11

‘독일’ 레퀴엠이라는 제목이 굳어졌지만 작곡가의 원래 뜻대로라면 ‘독일어’ 레퀴엠이 맞다. 가사를 라틴어 전례가 아닌 마르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즉 죽은 자를 위한 미사 전례라기보다는, 연주회를 위한 그랜드 오라토리오이다. 또한 이 곡은 죄나 벌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최후의 심판이나 구원을 갈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금욕적인 인내, 위로와 희망에 대한 갈망 그리고 운명에 대한 인간적인 관조를 담고 있다. 유한한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종교적 탐구라는 면을 놓고 볼 때 〈독일 레퀴엠〉은 베토벤 〈장엄 미사〉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브람스 이전이나 이후의 어느 작곡가도 서른이라는 인생의 중심에 이미 자신의 최대 걸작을 남긴 예는 없다(서른에 그 경지에 도달한 모차르트나 슈베르트 모두 바로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용이나 형식 모든 면에서 이 작품은 낭만주의 음악의 꼭대기 자리에 놓아도 손색이 없다. 오히려 이 작품 뒤에 오는 그의 여러 걸작은 규모나 혁신적인 아이디어 면에서는 〈독일 레퀴엠〉에 미치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베토벤은 만년에야 ‘미사’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이 몰두하고 있던 성악에 대한 몰두와 푸가에 대한 연구, 소나타 형식과의 결별을 시도했지만, 브람스는 이미 청년기에 독창적이고 드라마틱한 작품을 씀으로써 향후 좀더 고집스럽게 고전주의 형식을 고수하면서도 ‘반시대적’이라는 질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바그너조차 브람스의 초기 피아노 변주곡을 듣고서 “낡은 것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라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절대 음악’의 수호자로서 브람스가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은 이유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르네 레이보비츠가 『쇤베르크와 그의 악파』에서 밝힌 내용이 유독 관심을 끈다. 그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가〈피가로〉를 회상하고, 〈마이스터징거〉의 한스 작스가 에바에게 〈트리스탄과 이졸데〉중 여러 인물의 운명을 얘기하는 것은 단순한 창작상의 패러디가 아니며, 이러한 자기 인용은 극음악의 본질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바흐, 브람스, 베베른이 오페라를 쓰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즉 내적인 형식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두 소절 이상의 길이로 된 동기를 쓰지 못하게 했고, 그것 없이 오페라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형식과 구조에 집착했던 브람스에 대한 레이보비츠의 지극히 통찰력 있는 시각을 보여준다.

브람스의 유일한 오페라

<아름다운 마겔로네>는 브람스의 유일한 연가곡이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에 걸쳐 작곡한 이 곡은 독일 낭만주의 작가인 루트비히 티크의 시에 붙인 곡이다. 티크는 자신의 필명을 사용해 『페터 레베레히트의 민속 동요집』이라는 책을 발표했고, 브람스는 그 가운데 제2권 「아름다운 마겔로네와 프로방스 페터 백작의 놀라운 사랑이야기」의 시 15편을 골라 가곡으로 작곡했다. 곡을 쓰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브람스는 열네 살 때인 1847년과 이듬해 여름을 고향인 함부르크 인근 마을 빈젠에서 보냈다. 그곳에는 아버지가 알고 지내던 실 만드는 장인 아돌프 기제만이 살고 있었고, 브람스는 그 집에 머물며 딸인 리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친하게 지냈다. 스무 살 때인 1953년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에두아르트 레메니와 순회 여행을 시작한 그는 첫 연주를 빈젠에서 갖게 되고 여기서 리셴과 재회한다. 1861년에 다시 찾았을 때 리셴은 이미 결혼한 뒤였다. 1859년 브람스는 괴팅겐에서 열렬한 사랑을 나눴던 아가테 폰 지볼트와 헤어졌고 어릴 적 친구인 리셴은 그를 위로했다. 두 사람은 예전에 함께 읽었던 마겔로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티크의 작품은 열여덟 개 장(章)으로 되어 있고 시와 산문이 섞여 있는 방식이다. 티크는 여기서 시만 따로 떼어내 ‘젊은이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냈다. 그 가운데 브람스는 열다섯 개를 골라 가곡집으로 엮은 것이다. 나폴리의 공주 마겔로네와 프로방스의 백작 페터 사이의 사랑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곡 후회하는 자는 없다:
말을 타고 모험을 떠나는 기사의 이야기이다. 보이는 모든 것, 자연과 여인 모두가 가슴을 벅차게 한다. 그가 가는 곳에는 승리뿐이요, 적들도 그를 흠모한다. 마음에 드는 처녀도 만나게 된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아들에게 지나간 날들의 영광과 그 흔적인 흉터를 보여준다. 아직도 기억은 생생하게 저녁노을 속에 빛난다.

2곡 활과 화살을 갖추고:
활과 화살로 무장하고 말을 달리는 페터. 고귀한 운명을 지닌 자에게 행운이 따른다.

3곡 괴로움이냐 기쁨이냐: 페터는 나폴리에서 열리는 시합과 그곳의 공주인 아름다운 마겔로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에 대한 열망은 젊은 기사의 가슴을 벅차게 하고, 욕망과 희망이 뒤섞인 감정은 고뇌로 치닫는다. 삼라만상이 그녀에 대한 생각을 반영하고, 그녀 없이는 아무 것도 의미 없다.

4곡 사랑은 먼 나라에서 오고:
페터는 마겔로네의 유모에게 소중한 마음의 편지가 담긴 반지를 전한다. 사랑은 먼 나라로부터 와 내게 눈짓하고 기쁘게 때론 탄식하게 하네. 누가 나를 번민에서 구해줄 것인가. 세상은 거짓말이 난무하니 좀처럼 믿을 수 없네. 나를 구해줄 유일한 여인은 그녀뿐.

5곡 당신은 불쌍한 자를:
행운의 페터는 마겔로네로부터 답장을 받고 다시 반지 편지를 보낸다. 사랑에 대한 확신은 또 다른 불안감으로 초조하게 한다. 믿어도 좋을까, 누군가에게 빼앗기진 않을까.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자신감을 찾는다.

6곡 무한한 기쁨: 마겔로네는 그의 편지에 감동하고 유모를 통해 밤에 만나기를 청한다. 페터는 잠이 오지 않는다. 류트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사랑의 벅찬 감정이 부풀어 오른다.

7곡 입술이 떨리는 것은 그대 때문:
마겔로네와 만난 페터는 그녀에게 세 번째 반지를 주고 그녀는 답례로 목걸이를 건넨다. 사랑을 맹세하고 최고의 행복을 교환한 두 사람. 페터는 돌아와 노래한다. 그는 그녀와의 입맞춤에서 새로운 생명을 발견한다.

8곡 어쩔 수 없는 이별: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 페터가 오기에 앞서 시합에서 승리한 헨리 경이 마겔로네와 정혼을 하게 된 것이다. 페터 또한 부모로부터 돌아오라는 편지를 받는다. 마겔로네는 함께 도망치자는 말을 하게 되고 감동한 페터는 노래한다. 밤의 장막을 내려라. 아침이 우리에게 미소 지을 때까지.

9곡 쉬어요, 소중한 사랑:
나폴리를 탈출한 두 사람. 페터는 나무 그늘에서 마겔로네를 잠재우고 사랑스러운 자장가를 불러준다.

10곡: 페터는 잠자고 있는 마겔로네의 목에 걸린 주머니에서 자신이 보낸 세 개의 반지를 발견한다. 잠시 한눈파는 사이 새가 날아와 주머니를 물고 가고 페터는 새를 따라 바닷가까지 도달한다. 바다 한가운데에 놓인 주머니를 찾아 배를 저어가지만 성난 바다는 그를 주머니에 도달하게 하지 않는다.

11곡 빛도 반짝임도 사라지고:
페터가 없는 사이 잠에서 깬 마겔로네는 절망해 떠돌다가 양치기 노인의 집에서 머물게 된다. 물레를 자으며 그녀는 페터를 그리워한다.

12곡 슬픈 이별에:
바다에서 표류하던 페터는 무어인 해적에게 잡혀 바빌로니아의 술탄에게까지 끌려간다. 술탄의 정원지기가 된 페터는 아름다운 꽃 사이에서 류트를 연주하며 마겔로네를 그리워한다.

13곡 연인이여, 어느 땅에: 그러나 페터의 노래에 마음이 움직인 것은 술탄의 딸인 줄리마이다. 그녀는 페터와 함께 달아나자고 하지만, 페터는 꿈에 마겔로네의 모습을 보고 홀로 탈출한다. 멀리서 줄리마의 사랑의 노래가 들려온다.

14곡 나의 가슴은 기쁨에 넘쳐: 줄리마의 노래로부터 벗어난 페터는 마겔로네를 찾아 다시금 즐거운 노래를 부른다. 파도여, 고향으로 가자, 반드시 행복은 찾아온다.

15곡 진정한 사랑은 영원히: 각지를 헤맨 끝에 페터는 양치기의 집에서 마겔로네를 발견하고 두 사람은 재회하고 성대한 결혼을 한다. 나폴리 왕도 이들을 축복한다. 양치기의 집 자리에 큰 집을 짓고 나무를 하나 심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나무 밑에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다. 진실한 사랑은 영원하다.

슈베르트를 연상케 하는 피아노 반주와 간혹 보이는 바그너풍의 대담한 화성, 그러나 선율을 끌고 나가는 추진력과 그 전개 모습은 영락없는 브람스의 것이다. 끝내 오페라 영역으로 나가지 않은 브람스. 그러나 그가 오페라를 썼더라면 이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아리아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