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이야기<정준호 선생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로만짜 2009. 9. 23. 05:43

 

도대체 이 음악의 어느 점이 그토록 가슴을 부여잡게 만드는 것인가요? 이 음악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다음과 같은 악명 높은 비판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만일 지옥에 있는 음악 학교에서 한 재능 있는 학생에게 모세가 이집트에 내린 일곱 개 재앙에 대한 표제 교향곡을 쓰도록 했는데, 그가 라흐마니노프의 것과 똑같은 교향곡을 제출했다면, 그는 과제를 멋지게 수행한 것이고, 지옥 주민들에게 큰 기쁨을 줄 것이다.”
러시아 5인조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인 세사르 퀴가 1897년에 초연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1번을 듣고 한 촌평입니다. 오늘날 퀴를 라흐마니노프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스물세 살 젊은 작곡가는 선배의 악평에 철퇴를 맞은 듯했습니다. 지휘를 맡은 글라주노프가 술에 취해 무대에 올랐기 때문에 공연을 망쳤다는 사실도 그를 위로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모진 평가는 사실 모스크바에서 온 젊은이에 대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계의 텃새이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작곡가의 꽤 야심찬 작품이었던 교향곡 1번은 이렇게 참혹하게 짓밟혔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3년 동안 극심한 침체기를 겪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침체기가 단지 공연의 실패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당시 사촌인 나탈리아 사티나와 결혼하려고 했지만, 러시아 정교회는 근친 사이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젊은이에게 사랑의 실패만큼 좌절을 불러오는 것은 없겠지요.
그러나 그가 상심했다고 해서 흔히 알려진 것과 같이 은둔했다거나 아무 일도 못하는 무기력한 상황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에는 사바 마몬토프라는 예술 후원자가 있었는데, 그는 ‘모스크바 사설 러시아 오페라단’을 설립했습니다. 여기에 라흐마니노프를 지휘자로 위촉했고, 그는 기꺼이 받아 들여 열심히 일했습니다. 또한 이 오페라단에서 동갑나기 음악가로 위대한 베이스 가수가 되는 표도르 샬리아핀을 만났습니다. 둘은 곧 친구가 되었고, 이 우정은 오래도록 유지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라흐마니노프는 단지 빈 오선지를 보고도 아무것도 적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작곡가로서의 침묵이 오래될수록 상황은 나빠졌습니다. 도무지 악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교향곡의 실패와 사랑의 실패에 더해 라흐마노프의 창작에 더한 마지막 철퇴가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그가 존경하던 레프 톨스토이를 찾아가 보라고 권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에게 톨스토이는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작가를 두 번 찾았고, 두 번째는 친구인 샬리아핀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샬리아핀은 라흐마니노프의 가곡 하나를 그의 반주로 노래했습니다. ‘운명’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의 그 유명한 첫 동기로 시작하는 음악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음악이 누군가에게 필요할 거 같은가? 정말 듣기 싫군. 베토벤은 엉터리야.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도 마찬가지야.”
라흐마니노프의 충격은 컸습니다. 좀 있다가 톨스토이는 사과했습니다.
“미안하네. 난 노인네야. 자네를 속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
라흐마니노프는 바로 답했습니다. “베토벤도 아닌데 뭐 속상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정말 속이 시커멓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회복 불능이었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죠. 니콜라이 달이라는 의사가 라흐마니노프의 구원자가 됩니다. 달 박사는 그에게 ‘자기 암시’ 치료를 하는데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것이죠. 달 박사 스스로 첼로를 잘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이기도 했기에 더 치료가 잘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덕분에 다시 음악을 쓸 수 있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입니다. 1901년에 완성된 이 곡은 당연히 달 박사에게 헌정되었습니다.
라흐마니노프가 받은 심리 치료가 더 자세히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곡을 들어보면 궁극적인 약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라흐마니노프가 달 박사의 딸에게 끌려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대상이 누구였건 간에 이 음악을 관통하는 주제는 애틋한 사랑과 열정입니다. 곡의 초연 뒤인 1902년에 그는 마침내 사촌인 나탈리아와 결혼에 성공합니다. 모스크바에서 근교에서 군종 목사의 주례로 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린, 밀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작곡된 이래 이 음악보다 유명해진 음악은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이 곡은 당대의 감수성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데이비드 린 감독이 만든 영화 <밀회>(Brief Encounter)를 통해 이 음악은 다시 한 번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 됩니다. 영화의 내용은 얼핏 전형적인 통속 드라마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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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제슨은 남편과 두 아이를 가진 평범한 중산층 가정주부입니다. 교외에 사는 그녀는 열차를 타고 일주일에 한 번 시내 나들이를 합니다. 그런 그녀가 우연히 기차역 휴게실에서 알렉 하비라는 의사를 알게 됩니다. 알렉은 로라의 눈에 들어간 석탄가루가 빼줍니다. 짧은 만남 뒤에 헤어졌던 두 사람은 시내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고, 로라는 알렉이 매주 한 번 시내 병원에 진료를 나오는 의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알렉도 가정이 있었습니다. 순수한 호감을 갖게 된 두 사람은 다음 번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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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나 이메일이 있는 오늘날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로라는 은근히 다음 주가 어서 오기를 바라는 스스로에 놀랍니다. 영화 구경을 하고 보트를 타는 정도의 데이트만으로도 두 사람은 가슴이 뜁니다. 로라는 남편에게 알렉에 대해 얘기하지만,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로라는 떳떳치 못한 만남은 이제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맘처럼 쉽지 않습니다. 한 주 한 주 지날수록, 비록 12시 반부터 저녁까지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놀라운 동반자가 따르게 됩니다. 아무리 불청객으로 여기려 해도 사랑은 두 사람에게 기다려지는 손님이 되고 맙니다.
알렉은 로라에게 맘을 고백하고 로라도 흔들립니다. 알렉은 시내에 있는 친구의 빈집에서 로라와 밀회를 갖다가 느닷없이 돌아온 친구에게 모욕을 당합니다. 미리 뒷문으로 도망치긴 했지만, 로라도 말할 수 없는 치욕을 느낍니다. 결국 두 사람은 짧은 만남을 끝내기로 합니다. 알렉은 괴로워하는 로라를 위해 남아프리카로 떠날 계획을 이야기합니다.
두 사람이 역 휴게실에서 슬픈 마지막 만남을 갖는 동안 수다스러운 로라의 친구가 들어옵니다. 결국 알렉과 로라는 변변한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집니다. 알렉은 잠시 로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문을 나서고, 로라는 급행열차에 몸을 던지려 밖으로 뛰쳐나가지만 모질지 못해 들어옵니다. 그녀는 낙담해 집으로 돌아오고, 벽난로에서 낱말 퀴즈를 푸는 남편에게 마음속으로 그동안 있었던 일을 고백합니다. 실은 이 고백으로 앞선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죠.
영화의 전편에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이 흐릅니다. 기차가 들어오는 첫 장면에 울리는 피아노의 도입부는 마치 운명과 같은 사랑을 알리는 종소리 같습니다. 알렉과 로라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장면마다 음악이 흐릅니다. 음악은 두 사람이 그리는 세계, 현실을 벗어난 곳을 상징합니다. 각자의 현실로 돌아가면 일체의 음악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데이비드 린은 배우의 의지와 사랑의 감정을 음악과 완전히 일치시키기 때문에 그 작동 원리가 결코 유치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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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 퀴즈를 푸는 남편이 존 키츠의 시에 나오는 알파벳 일곱 개로 된 단어를 로라에게 묻습니다. ‘로맨스’(Romance)라는 답을 말하는 로라는 죄책감을 느끼며 라디오를 켭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2번입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사실 이 키츠 시의 전문은 영화 전편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나 죽으면 어쩌나 두려울 때
내 팬이 충만한 머릿속을 다 추수하기도 전에 죽으면
높은 책 더미가 글로 가득 찬 곳간인 듯
잘 영근 낱알을 갈무리하기 전에 죽는다면
그리고 별빛 가득한 밤의 얼굴에서
진정한 로맨스의 어렴풋한 상징을 보고
더 이상 살지 못하면 어쩌나 생각이 들 때
마법과 같은 손으로 로맨스의 흔적을
다 베끼지 못하고 삶을 마치면 어쩌나
그리고 한 동안 만났던 아름다운 그대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하면 어쩌나 생각할 때
마법의 힘도 즐겁지 않으면 어쩌나
지각없는 사랑의 힘도
그때는 이 넓은 세상 끝에 홀로 서서 생각합니다
사랑과 명예가 의미 없는 것으로 잠길 때까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키츠를 완벽하게 음악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영화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져다줍니다.
이 곡을 낳게 한 달 박사는 뒤에 베이루트로 이주합니다. 그는 1928년 아메리칸 대학 오케스트라가 아르카디 쿠구엘이라는 피아니스와 라흐마노프의 협주곡을 연주할 때 악단에 비올라 주자로 참가했습니다. 그는 청중에게 작품을 헌정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되었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답례를 한 뒤에도 오랫동안 박수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소중한 감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달 박사에게 감사의 박수를 아끼지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