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살리에리라는 작곡가가 우리에게 친숙해진 것은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를 통해서이다.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울부짖고 고해하던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예술가의 삶을 넘어 역사의 뿌리 깊은 문제를 되짚어 볼 수 있었다. 또한 이 영화를 통해 그에 대한 오랜 혐의가 재론되었다. 모차르트의 살해 여부이다. 그리고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오해에는 그럴만한 의혹이 있기도 하다.
살리에리는 1750년 이탈리아 베로나 인근의 레냐고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타르티니에게 음악을 배웠던 형으로부터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를 배웠다. 일찍이 음악 따위에 관심이 없던 부모를 여의고(영화에서 살리에리는 이를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파도바와 베네치아로 가 음악공부를 계속한다. 1766년 베네치아에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플로리안 레오폴트 그로스만을 만난 살리에리는 그를 따라 빈으로 가게 되고, 계속해서 작곡을 배운다. 1774년 그로스만이 죽은 뒤 황제 요제프 2세는 살리에리를 궁정 작곡가로 임명한다. 시골 출신의 살리에리로서는 일약 스물네 살에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음악가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그는 1788년에는 황실 궁정 악장에 임명되었고, 죽기 한 해 전인 1824년까지 이 지위를 유지한다.
일단 영화가 사실과 다른 점을 살펴보자. 영화에서 머리 에이브럼이 분한 그의 모습은 실제 나이보다 더 노숙해 보인다. 그는 모차르트보다 여섯 살 많았을 뿐이며, 모차르트가 빈에 정착한 1781년에 그 또한 서른한 살밖에 되지 않았다. 영화에서 살리에리가 자신이 사랑하던 소프라노 가수 카테리나 카발리에리를 모차르트가 가로챈 것을 알고 그에 대한 증오를 키우는 것 또한 픽션이다. 개연성은 있지만, 그는 이미 궁정 작곡가가 된 1774년 테레제 폰 헬퍼스토르퍼와 결혼했고, 두 사람은 여덟 자녀를 두었을 정도로 화목했다.
가장 의문시 되는 것은 모차르트의 타살설과 여기에 살리에리가 연루되었는가 하는 사실이다. 모차르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은 그의 사후에 계속되었고, 살리에리와 더불어 프리메이슨 결사 등이 이를 사주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일단 살리에리가 여기에 거론되는 직접적인 이유는 일찍이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작곡된 17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뛰어난 음악에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는 빈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그 배후에 살리에리의 방해가 있었다고 여러 차례 편지에서 지목했다. 물론 이러한 추측은 좀 무리가 따른다. 즉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 큰 적개심을 가졌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정황이 있을 뿐. 도리어 그를 적으로 생각한 것은 쫓는 입장인 모차르트 편이었을 것이다.
당시 살리에리는 최고의 추앙을 받는 작곡가로 모차르트와의 경쟁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주변에서 각각 이탈리아와 독일을 대표하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간의 라이벌 의식을 부추겼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 자신도 창의적인 음악가로서 천재 모차르트에 경이로움을 느꼈을 것임에 틀림없다.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는 화려하고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나폴리 악파와 코믹한 줄거리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부파가 유행하고 있었다. 조반니 파이시엘로, 도메니코 치마로사 그리고 살리에리의 작품은 이와 같은 빈의 음악적 취향을 잘 대변하고 있었다. 반면 ‘징슈필’, 즉 노래극을 표방한 모차르트의 독일어 오페라는 계몽적인 주제 의식이 대중에게 다소 무겁게 느껴졌다. 모차르트의 중요한 후원자였던 황제 요제프 2세도 독일 작곡가들의 활발한 활동을 장려했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스타 가수를 기용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고, 달달한 멜로디의 이탈리아 오페라를 선호하는 일반 관객의 입맛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황제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게 각각 하나의 주제로 오페라를 쓸 것을 주문한다. 그 주제란 “오페라는 어떻게 탄생하는가”라는 것이다. 무대 이면의 이야기를 담을 것을 명한 황제의 분부에 살리에리는 <음악이 첫째, 말은 둘째>라는 작품을 내놓는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은 <극장 지배인>이다. 황제는 이 작품들을 통해 오페라가 어떤 조건 아래에서 생산되는지 보여주고자 했고, 결과는 대립과 음모로 점철된 빈 오페라 극장에 대한 풍자였다. 황제는 자신을 조여 오는 이탈리아와 독일 양 진영의 요구에서 스스로는 한 발짝 비켜서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대리전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쇤부른 궁에서 상연된 두 오페라는 살리에리 작품의 승리로 끝났다. 일단 살리에리의 <음악이 첫째, 말은 둘째>가 1시간의 상연 시간인데 비해 모차르트의 <극장 지배인>은 그 절반도 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한창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하고 있을 시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작곡료도 이들의 이름값의 차이를 보여준다. 살리에리는 100 두카텐, 이에 비해 모차르트는 50 두카텐을 받았을 뿐이었다. 대본도 살리에리 오페라가 더 흥미진진하다. 이 대본의 문제에서 생각해 보면 살리에리의 작품 제목과는 달리 ‘말이 첫째, 음악은 둘째’였던 셈이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살리에리가 이탈리아 음악과 언어에 대해 가진 절대적인 우월감은 분명하다. 그는 훨씬 뒤에 어린 슈베르트를 가르쳤다. 슈베르트는 괴테와 실러의 독일어 시를 노래로 작곡하고 싶어 했지만, 살리에리의 눈에 그것은 하잘 것 없는 일이었다. 그가 보기에 독일어와 독일시는 노래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이탈리아의 ‘스탄차’만이 아름답고 우아한, 노래 부르기에 적합한 가사였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대리전 양상을 보이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대립을 천재와 범인의 관계로 몰아간 것은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푸슈킨이었다. 그는 이미 1830년에 <석상의 손님>이라는 작품을 통해 <돈 조반니>의 모티프를 다루었다. 여기서 돈 후앙(돈 조반니의 스페인식 이름)은 단순한 난봉꾼이 아니라 자신과 세계의 단절을 더 이상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예술가였다. 바로 모차르트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2년 뒤에 나온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좀더 직접적으로 그의 전기적인 면에 파고든다.
이 작품에서 살리에리는 열심히 노력하는 성실한 인물이고, 모차르트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천재이다. 살리에리는 “머리에 기름이 부어진” 모차르트를 당해낼 재간이 없고, 그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그가 실제로 독살을 했는지 여부보다는 모차르트가 죽은 뒤 오히려 더 큰 명성을 얻게 되고 자신은 점차 잊혀져가는 살아 있는 박제의 운명이 아이러니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원작인 피터 셰퍼의 희곡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 작품은 살리에리가 <레퀴엠>의 주문자로 모차르트를 마지막 죽음으로 몰아갔고, 그의 오페라가 나올 때마다 뒤에서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는 식으로 몰고 간다.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 그 진위 여부가 아니다. 오히려 이 설정은 모두가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체 작품의 맥락을 알고 났을 때는 그저 하나의 소품처럼 여겨진다. 그 소품이 등장한 이면에는 태고 적부터 시작된 “기름 부어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반목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카인과 아벨, 야곱과 에사오, 요셉과 그의 형제들, 다윗과 사울, 헤롯과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또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수많은 왕위 쟁탈전에 이르기까지 그 행렬은 그치지 않는다.
흔히 역사는 살아남은 자, 즉 권력을 얻은 자의 손으로 기록되기에 언제나 승자의 편을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모차르트의 경우 승리는 죽은 이들의 것이었으며, 그들의 유산인 교리와 음악을 통해 그 생명은 영생을 얻게 된다. “기름 부은 분”의 뜻인가? <^^ 글 펌 KBS 1FM 실황음악회 진행자 정준호님 >
'음악 이야기<정준호 선생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병기 5집 <달하 노피곰> (0) | 2007.10.02 |
---|---|
고섹과 생조르주 (0) | 2007.09.30 |
륄리의 알세스트 (0) | 2007.09.30 |
말러의 교향곡 2번 (0) | 2007.09.30 |
살롱 드 뢰이 드 뵈프와 에카르트 (0) | 2007.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