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gei Prokofiev (1891~1953) Violin Concerto No. 1 in D major, Op. 19
프로코피예프의 작품세계는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1904∼17년 러시아 혁명까지의 청년 시절이고,
두 번째는 1918∼33년 미국 망명 시절, 마지막 시기는 1933년 러시아 귀국 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이다.
이 세 시기로 보았을 때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은 1917년으로 첫 번째 시기 말,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은 1935년으로 마지막 시기 초에 작곡되었다.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이 작곡되던 당시 프로코피에프는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초연당시 반응만큼이나
반발을 일으킨 발레곡으로 인해 러시아 음악가들 사이에서
독특하고 야심찬 작곡가로 불렸는데 이 작품에서도 역시 청년기 시절의 대담함이 엿보인다.
하지만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은 비교적 고전적인 느낌이 강하고 리리시즘적인 요소가 많이 스며있다.
프로코피예프가 이 작품을 쓰기로 결심했던 것은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시절인 1913년이었으나
그 이듬해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과 1917년 러시아혁명 등 혼잡한 사회정세 속에서
음악원 교수 파울 호찬스키의 협조로 1917년 여름에서야 완성됐다.
1914년 음악원 졸업이후 그는 작곡가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어머니의 권유로 영국 런던에 머물렀는데 마침 그곳에 디아길레프도 와있었다.
프로코피예프 피아노협 주곡 제2번을 듣고 감명을 받은 디아길레프는 프로코피예프를
국제적인 무대에 등장할 수 있도록 후원하게 된다.
그렇게 상승세를 타면서 프로코피에프는 1917년 여름을 음악원 근처에서 보내면서
고전적 교향곡의 작곡을 시작하였으며 그동안 미루었던
바이올린협주곡 제1번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하게 된다.
작곡한 이듬해 프로코피에프가 망명길에 올랐기 때문에 초연은
1923년 마르셀의 독주와 쿠세비츠키의 지휘로 파리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평론가들은 너무 감상적이고 지나치게 음악에 심취했다며 '리리시즘의 과다'라고 혹평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6월 프라하 국제 현대음악제에서 시게티가 이 곡을 연주한 이후 인기가 급상승하게 되었다.
시게티 역시 각지의 연주회에서 이 곡을 필수 레퍼토리로 넣어 인지도를 높이는데 공헌하였다.
프로코피예프도 그런 시게티의 모습에 감사하여 '나의 협주곡의 최고 연주자'라고 부르면서
이 작품을 통해 그들은 더욱 긴밀한 사이가 된다.
1953년 3월 일본 도쿄에서 연주회를 하고 있던 시게티는
프로코피예프가 모스크바에서 서거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절친한 친구를 애도하며 자신의 공연에서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제2악장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 녹음은 시게티의 40대초 전성기 연주이며 확고한 기교와 엄격한 형식감,
긴장감 감도는 정신성과 아울러 일종의 화려함이 전곡을 감싸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제1악장은 안단티노이며 바이올린이 독주하는 명상적인 주제가 비올라의 트레몰로를 타고 나타난다.
곡을 들으면 프로코피에프의 슬라브적인 정서가
차이코프스키나 글라즈노프와는 전혀 다른, 이지적이며 세련된 감각을 지녔음을 깨닫게 된다.
제2악장은 스케르쪼이며 발랄하고 빠른 템포로 치닫는다. 엄청난 바이올린의 기교가 필요하다.
제3악장은 모데라토이다. 변주곡 같은 성격이면서도 풍성한 선율을 간직한 감명 깊은 악장이다.
<웹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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