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교향곡

베토벤/교향곡 9번 Op. 125 - '합창' -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지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소프라노) 외

로만짜 2016. 1. 3. 21:06

 

 

 

 

 

 

 

 

  

 

L. V. Beethoven (1770~1827)
Symphony No.9 in D minor, Op. 125 'Choral'

 

 

 

  1. Allegro ma non troppo,
                               un poco maestoso (17'58") 
 

  2. Molto vivace - Presto (12'03")  

 

  3. Adagio molto e cantabile (19'38")  

 

  4. Presto: Allegro assai (25'10")

   

4,1~3 순으로 연속듣기
 
 
Elisabeth Schwarzkopf, sop
Otto Edelmann, bass
Hans Hopf, tenor
Elisabeth Hongen, contralto
Wilhelm Furtwangler, cond
Bayreuth Festival Orchestra
Bayreuth Festival Choir
Recorded: 29. VII. 1951, Festspielhaus, Bayreuth
 
 
 
 
 
푸르트뱅글러가 독일의 작곡가인 리하르트 바그너가 창시한
바이로이드 페스티벌 무대에 처음으로 서게 된 것은
1931년 음악감독으로 부임하면서였는데, 당시의 상황은 음악감독이었던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결국
푸르트뱅글러는 일년 만에 감독 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1936년과 1937년, 1943년 그리고 1944년에 다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지휘하기도 했다.)

1944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막을 내렸을 때 당시
연합군이 독일 영토로 이동해 옴에 따라
독일 전역의 공연장들은 모두 문을 닫아야 했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열리던 페스티벌 하우스 역시
1945년 폭격으로 상당한 훼손을 입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에 의해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하우스는 다시 운영되기
시작하였지만, 창시자인 바그너 가문에 의해서
페스티벌이 열린 것은 1951년 이후였다.

푸르트뱅글러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재개관을 기념하는
특별 오프닝 공연으로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지휘를 제안 받았는데,
이것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그의 마지막 인연이 되었다.

그가 이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는데,
첫째는 이미 카라얀이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모두의 지휘를
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푸루트뱅글러가 당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대립각을
이루고 있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4년간의 음악 감독직 계약을 막 확정 지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바이로이트에서 7월29일 마지막 지휘를 마친 푸르트뱅글러는
신속히 잘츠부르크로 떠나 8월 1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모짜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지휘를 맡아 공연했으며,
이후 그는 두 번 다시 바이로이트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지휘를 맡았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는 오프닝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부터 매서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본래 공연 전에는 어느 정도의 긴장감이 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이 공연은 참혹했던 전쟁과 그로 인한 막대한 훼손을 입은
공연장 때문에 무려 6년만에 다시
열리게 되는 공연이기도 했으며,
페스티벌의 지휘를 맡은 앙숙이었던 두 지휘자 푸르트뱅글러와
헤르베르트 폰카라얀 사이에 감도는 불편한 심기도 한몫을 했다.

또 다른 불협화음의 이유는 바그너 가문이 내린 의외의 결정 때문이었는데,
그는 당시 최고의 라이벌 관계에 있던 음반사인
EMI와 Decca 모두에게 녹음권리를 주었으며,
이를 실황 녹음하게 계약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EMI의 최대 목표는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는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녹음하는 것이었고,
그들은 매우 성곡적인 녹음을 녹음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EMI는 카라얀의 지휘로
반지 4부작 으로 불리는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역시
녹음하였는데, 후에 부분적으로만 발매가 되었다.
데카에서 참여한 레코딩 엔지니어들
역시 한스 크나퍼츠부쉬(Hans Knappertsbusch)의
지휘 하에 실황 녹음작업을 진행하였다.

EMI 최고의 프로듀서였던 월터 레그에게 이토록 기념비적인
오프닝 콘서트에서 실황녹음을 진행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페스티벌이 열리기 바로 전인 7월6일경 그는
푸르트뱅글러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게 되었는데,

이 편지에서 푸르트뱅글러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하우스의 음향이
실황녹음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EMI가 추진하고 있는 녹음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월터 레그는 그를 설득하는데 성공했고,
EMI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프닝 공연의
실황 녹음을 확정 지을 수 있었다.
 
 
 
준비단계부터 그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무대이기에 특별 오프닝 공연이 열렸던 당일은
그 흥분과 기대감이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특히, 이 공연은 전세계적으로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었고,
당시 객석은 모두 예술계와 정치계의 유명인사들로 가득 찼었다.
당시 솔리스트로 참여한 소프라노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는
'놀랍도록 감동적인 공연(incredibly moving)'
이라는 말로 연주회를 회상했다.

아침에 시작된 리허설은 공연 직전까지 이어졌으며,
최고의 뮤지션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는 단원 모두가
자신의 몫을 훌륭히 치러내며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연주회를 만들어 냈다.

푸르트뱅글러 사후에 미망인 엘리자베스 푸르트뱅글러는
이 오프닝 공연 실황녹음의 상업적 발매를 허락해 주었고,
이 레코딩은 처음으로 LP의 한 면에 한 악장씩 만을 담아
더블 LP 형태로 발매되었는데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같은 곡의 레코딩은
푸르트뱅글러의 74분짜리 연주보다 10분 더 짧은 것이어서,
HMV는 2악장과 3악장을 한 면에 담고,
나머지 한 면에는 다른 교향곡을 수록할 수 있었다.
(세 가지의 다른 버전들도 비슷한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커팅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이후에 발매된 푸르트뱅글러의
LP 에디션 에서는 전곡을 3개의 면에 실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실황 레코딩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의
탁월한 곡 해석력은 이미 레코딩이 처음
발매되었을 때 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트레버 하비(Trevor Har-vey)는 그라모폰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이 실황 레코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푸르트뱅글러의 지휘는 그 어떤 지휘자들의 해석보다도 주관적인 접근으로
이루어졌지만, 그가 이끌어낸 베토벤 교향곡 9번의
강력함과 아름다움은 결코 그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 위대한 명연주이다.'
<음반 내지 해설 알란 샌더스(Alan Sanders), 1998 번역 이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