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ert Schumann (1810~1856) Cello Concerto in A minor, Op. 129
슈만이 첼로 협주곡을 작곡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쿰머, 그뤼츠마허, 그라바우, 롬베르크 등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들과 예술적으로 교류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영향보다는
그 자신이 어려서 첼로를 배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첼로가 지닌 시적, 애가적, 열정적인 기질과 능력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 점은 그의 첼로 소품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슈만은 협주곡을 작곡하기 1년 전에 집중적으로 소품들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대형 캔버스를 대하기 전에 소품으로 실험하는 화가들과 흡사했다.
이 곡은 1850년 10월에 뒤셀도르프에서 작곡, 6일 만에 스케치를 끝내고 8일 후 완성했다고 한다. 이렇게 단숨에 작곡이 가능했던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슈만의 병상을 지킨 아내 클라라였다.
그녀에 의하면 슈만은 심한 환각증세에 시달리다 깨어나면 고통을 무릅쓰고 이 작품을 수정하려 안간힘을 쓰곤 했다고 한다.
이는 마치 곡을 수정함 으로서 자신도 환청과 환각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하는 행위 같았다고 했다.
이 협주곡은 1860년 6월 9일 라이프치히 음악원 연주홀에서 열린 슈만의 50회 생일축하 연주회에서 에베르크에 의해 초연 되었다.
초연 당시에는 많은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슈만이 사망한 직후 포퍼, 코스만, 다비도프 들의 연주로 모든 첼리스트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협주곡이 되었다.
슈만의 협주곡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독특한 영향을 주었다. 우선 이 곡도 고전주의 협주곡처럼 빠르고-느리고-빠른 3악장으로 구성되었지만, 악장간을 단절하지 않고 순환 형식으로 묶어 리스트의 교향시처럼 낭만적 특성을 갖게 했다.
또한 협주곡의 특성인 투티와 솔로의 이중 제시를 하지 않고 짧은 투티의 서주를 이어 첼로가 직접 제시부를 이루도록 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2악장에서 보여준 것처럼 작곡가의 심리적 이중성을 협주곡의 내용에서 부상시켜 독일 낭만주의의 진수를 투영토록 했다.
끝으로 빠른 악장에서 고전적 소나타 형식에 서정적이고 드라마틱한 성격을 접목하여 표제음악을 예고한다.
낭만시대에 기악협주곡은 두 갈래로 발전되었는데, 하나는 다양한 기교를 전시하기 위한 기능적 협주곡이고, 다른 하나는 독주악기가 감정표현이나 기교보다 교향곡적 형식을 충족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교향곡적 협주곡이다.
이 협주곡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슈만의 위대한 교향곡적 작품들 중 하나일 것이다. <웹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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