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 / 감상적인 왈츠

로만짜 2007. 3. 13. 04:48

Valse sentimentale ,Op.51 No.6

차이코프스키 / 감상적인 왈츠

Pyotr Ilich Tchaikovskii (1840∼1893)


Valse sentimentale Op.51 No.6

우린 보통 '왈츠'(Waltz, Valse) 하면 오스트리아 빈의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의 왈츠를 떠올린다. '왈츠' 연주회를 해도 대한민국의 왈츠 연주회는 빈 왈츠뿐이다. 하지만 세상에 왈츠가 어디 빈 왈츠뿐인가? 만약 왈츠가 빈 왈츠 뿐이었다면 얼마나 심심했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그러나 음악사를 한 꺼풀만 열어 제쳐 보면 정말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19세기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 가운데 하나가 왈츠였던 것을 확연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작곡가 치고 왈츠를 남기지 않은 작곡가가 거의 없다는 이 놀라운 사실에서 이를 느낄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무곡이 미뉴에트였던 것처럼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렌틀러를 선조로 삼고 있는 이 무곡 왈츠는 낭만주의 시대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춤곡이었다.

19세기 음악사, 문화사에 있어 왈츠는 국제적 언어였다. 유럽 궁중에서 왈츠를 모른다는 것, 왈츠를 춤출 줄 모른다는 것은 엄청나게 유행에 뒤쳐진 일이었다. 그 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패션과 모드가 궁정에서, 상류사회에서 중요했기 때문에 유행에 뒤쳐지는 것을 각국의 귀족들은 참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엔 다른 춤은 좀 못 춰도 왈츠만 잘 추면 무도회에서 별 문제 없이 버틸 수 있었다.

유럽 전역에 퍼진 '사랑의 묘약', 왈츠
왈츠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경지방인 바이에른 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지만 오스트리아의 국경선만 넘으면 이내 다른 나라의 기질과 특성이 깊이 투영되었다. '쿵작작' 3박자라는 것만 같지 전혀 다른 느낌의 음악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유럽 여러 나라로 이 왈츠가 퍼지게 된 것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1830년대 유럽 순회 공연 때문이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접한 각국 왕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들은 왈츠의 흥겨움에 반해 적극적으로 왈츠 음악을 수입하고 작곡가들에게 왈츠를 만들도록 장려한다. 이 '빈 대중 정신의 악마'(바그너)는 파리와 런던, 베를린에서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 전유럽의 무도회와 콘서트홀을 화려하게 수놓게 된다.

한때 왈츠는 궁정에서 반대론자들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첫째, 춤이 너무 빠르기 때문에 심장에 나쁘다. 둘째, 남녀가 꼭 껴안고 추는 것이 남녀를 미혹시켜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살로모 야콥 볼프는 위의 내용을 담은 '왈츠가 우리 세대의 몸과 마음에 끼치는 해로운 영향에 대하여'라는 팸플릿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으니 왈츠는 당시에 여러가지로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킨 주인공이었다.

사실 당시에 눈빛으로만 알고 있던 서로 모르는 남녀가 가까워지고 첫 인사를 나누는 데 왈츠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 일련의 소설들에서 등장하는 젊은 청년 장교와 귀부인의 로맨스도 모두 이 무도회의 왈츠에서 비롯되었음을 볼 때 왈츠는 당시에 '사랑의 묘약' 구실을 톡톡히 했다.

이제 왈츠는 빈 작곡가들의 손을 떠나 각국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환상 교향곡' 속의 2악장 무도회 장면을 '왈츠'로 만들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대범한 작곡이었고 베를리오즈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포레도 돌리(인형) 모음곡 속에 사랑스런 왈츠를 집어넣기도 했으며, 프랑스 궁정의 음악교사였던 발트토이펠은 나폴레옹이 개막식을 올렸던 무도회에서 쓰인 '스케이팅 왈츠'를 작곡하기도 했다.

왈츠는 오페라에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푸치니는 '라보엠'의 무제타의 왈츠, '서부의 아가씨'의 주막 왈츠 장면을 구노는 로미오와 줄리엣 중의 줄리엣의 왈츠 '나는 살고 싶어요' 파우스트 중의 마르그리트의 왈츠 '보석의 노래'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합창 왈츠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에 오페라를 좋아하는 리스트는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중 합창 장면을 피아노로 편곡한 '파우스트 왈츠' 그리고 자신이 레나우의 '파우스트'를 읽고 만든 초절기교의 '메피스토 왈츠'를 작곡 또는 편곡, 지금도 널리 피아니스트들에 의해 널리 연주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왈츠의 광대한 영향은 쇼팽의 피아노 왈츠 곡들에서부터 이탈리아 칸초네, 팝송에까지 이어진다. 이탈리아 칸초네 빅시오의 '사랑한다 말해다오, 마리우여'(Parlami d'amore, Mariu) 그리고 1970년대의 '마지막 왈츠'(The Last waltz)라는 미국 팝송으로도 작곡되기도 했다.

왈츠의 아름다운 꽃송이가 만발한 곳은 러시아
오스트리아에서 탄생한 왈츠가 가장 번성한 곳은 바로 러시아다. 마치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발레가 프랑스를 거쳐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봉오리를 피웠듯이 왈츠는 러시아로 건너가 제2의 개화를 하면서 르네상스를 맞는다. 물론 러시아에 왈츠가 유행하게 된 계기도 요한 슈트라우스의 순회 연주 덕분이었는데 러시아인들은 자신들 슬라브인의 민족성인 우수와 슬픔이 담긴 왈츠의 개념을 내놓게 된다.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글린카의 '판타지 왈츠'에 의해 처음 러시아 음악 속에 편입된 왈츠는 '러시아의 왈츠 왕'이라고 불리는 차이코프스키 덕분에 그 아름다운 꽃송이가 만발하게 된다.

왈츠를 사랑한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이 발표한 모든 장르의 음악에 왈츠를 삽입했다. 그의 3대 발레 '백조의 호수' '잠자는 미녀' '호두까기 인형' 속에 넘쳐흐르는 아름답고 유명한 왈츠 선율들은 말할 것도 없고 피아노 소품 '감상적인 왈츠' '나탈리아 왈츠', 실내악 트리오, 교향적 모음곡 중 '멜랑콜릭 왈츠', 교향곡 5번 3악장의 왈츠, 현을 위한 세레나데 가운데 왈츠를 삽입했을 뿐만 아니라 기어코 오페라에도 왈츠를 사용했다.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가운데 2막 타티아나의 생일 장면의 합창이 담긴 시원스런 왈츠가 바로 그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왈츠에 대한 사랑은 아무도 못말릴 정도였다. 차이코프스키 발레 속의 왈츠 가운데는 '호두까기 인형' 가운데 눈의 왈츠가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린이 합창이 왈츠에 맞춰 나오기 때문인데 발레에 합창을 쓴다는 것은 정말 파격적인 형식 파괴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차이코프스키에 의해 융성해진 러시아의 왈츠는 볼세비키 혁명 이후의 20세기 러시아 음악에도 그 전통을 이어나가게 된다. 가장 활발하게 왈츠를 만든 작곡가들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아람 하차투리안,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그리고 게오르기 스비리도프이다. 쇼스타코비치의 경우 최근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 그리고 우리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 삽입되어 잘 알려진 재즈 모음곡 중 '왈츠2'가 CF에도 쓰이는 등 요즘 한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외에도 실제로 영화음악과 실용음악 분야에서 다양한 왈츠 곡을 남기고 있다. 발레 '스파르타쿠스'나 '가야네'의 작곡가로 유명한 하차투리안도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희곡 '가면무도회'에 맞추어 1941년에 극부수 음악으로 '가면무도회' 모음곡을 만들었는데 그 중 첫 곡이 왈츠. 러시아적인 서늘한 열정을 만끽할 수 있는 넘치는 박력의 명곡이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도 다양한 왈츠 작품을 남긴 작곡가다. 프로코피에프는 아예 왈츠 모음곡을 썼고 두 개의 푸슈킨 왈츠, 영화 '석화' 음악 가운데 2개의 왈츠 등을 남겨 왈츠 음악에도 이름을 남기고 있다.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의 회장이기도 했던 스비리도프는 푸슈킨의 옴니버스 소설 '벨킨 이야기'중 '눈보라'의 영화화에 참여, 대중적이고 쉬운 모음곡 '눈보라'를 만들었는데 그 중 2번째 곡이 '왈츠'이다. 이 왈츠는 러시아의 국영 쿨투라(문화) 텔레비전의 문화 뉴스의 시그널로도 쓰이고 있다. 그동안 왈츠하면 빈 왈츠만 생각하셨던 분들도 이제 다채로운 왈츠의 세계에 눈과 귀를 돌려보면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활짝 열리는 것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Shall We Dance?!

 

출   처: philharmonic / / philharmon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