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 /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 서곡

로만짜 2007. 3. 17. 04:24

'Romeo and Juliet' Overture Fantasy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 서곡

Pyotr Ilich Tchaikovsky 1840∼1893

  

 

 

작품 배경 & 해설

옛날 이탈리아 베로나의 몬테규와 캐플렛 두 집안은 오래도록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러나 로렌스 사제의 중재로 일시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몬테규 집안의 아들 로미오와 캐플렛 집안의 딸 줄리엣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두 집안 사이의 결혼이란 불가능한 일. 이러한 딱한 사정을 안 로렌스 사제는 두 사람을 위해 한 가지 계략을 생각해 내었다. 그것은 줄리엣에게 잠자는 약을 먹여 죽은 것처럼 위장하여 묘지에 운반하도록 하고 로미오를 불러 두 사람을 맺어 주려는 것. 그러나 불행히도 이 계획을 로미오에게 알리려고 한 친구는 로미오와 길이 엇갈리고 소문으로 줄리엣의 죽음을 전해들은 로미오는 줄리엣 옆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만다. 얼마후 잠에서 깨어난 줄리엣은 로미오가 죽은 것을 보고 자신도 따라 죽고만다. 이것이 세익스피어의 유명한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거리이다.

차이코프스키의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러한 비극적인 줄거리의 바탕위에 종교적인 색채를 띄고 장중하게 시작된다. 이 선율은 극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도사 로렌스를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이어서 거칠고 격앙된 반목의 테마가 폭발하는데, 이것은 몬테규와 캐퓰러트 두 가문의 피비린내 나는 격투의 장면이다. 이윽고 격투의 소란이 진정되면서 잉글리쉬 혼과 비올라에서 우아한 선율이 흘러나온다. 이것은 로미와 줄리엣의 청순하고 덧없는 사랑의 테마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것을 "러시아의 모든 음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테마"라고 절찬하고 있다. 음악은 반목의 테마와 사랑의 테마가 서로 얽혀 비극적인 색채를 차츰 짙게 하면서 파국을 향하여 전개되어 나간다. 차이코프스키의 독특한 색채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이 이 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마지막은 파국의 장면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청순하고 아름다운 사람의 테마와,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하프의 분산화음이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인데, 차이코프스키가 이 작품을 작곡하게된 배경은 당시 <러시아 5인방>의 리더인 발라키레프(1837-1910)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당시 국민음악 창조를 목적으로 결성된 <5인방>의 멤버는 발라키레프, 큐이,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 등 쟁쟁한 젊은 작곡가들이었고, 차이코프스키는 그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발레키레프가 차이코스키에게 이 곡의 작곡을 권유했을 당시의 상황을 차이코프스키의 친구이며 또 그의 전기를 쓰기도 했던 카슈킨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발라키레프와 차이코프스키 그리고 나는 산책을 무척 좋아했다. 어느날 세 사람이 함께 산책하러 나갔을 때 발라키레프가 차이코프스키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작곡을 권유했다. 5월의 아름다운 어느날이었다. 우리가 산책하던 언덕의 그 초록빛 숲과 높다란 전나무들…. 발라키레프는 차이코프스키의 재능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암시하는 소재를 차이코프스키가 충분히 소화하여 살려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라키레프 자신도 이 테마에 크게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이 마치 완성된 음악인 것처럼 면밀하고 정확하게 그 구성을 설명해 나갔다.……이것이 계기가 되어 젊은 차이코프스키의 환상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차이코프스키는 그해(1869년) 9월부터 11월 사이에 환상적인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를 완성하여 다음해 3월에 초연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데가 많아서 상당한 부분을 수정했고, 그후 11년이 지난 1881년에 다시 손질을 하여 오늘날 연주되고 있는 형태로 출판했다. 따라서 이 곡의 스코어는 1869년의 제1고, 1870년의 제2고, 그리고 1881년의 제3고 등 세 가지가 있는 셈이다. 차이코프스키는 표제음악적인 작품이라 하더라고 그 표제성에 별로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표제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나 인상을 전달하려는 방袖막?처리하는 수가 많은데, 먼저 분위기를 선율로 나타낸 다음 그것을 오케스트레이션으로 교묘하게 증폭해 나가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표제성이 더 강하게 표출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그의 특성이며, 동시에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구성 및 해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적 관현악곡의 작품 중에는 이 <로미오와 줄리엣>이외에 <햄릿>, <프란체스카다 리미니>, <템페스트>, <만프레드>등 세익스피어, 바이런, 단테 등의 문학 작품을 바탕으로 한 명곡들이 많다. 차이코프스키는 문학자들의 작품 가운데서 특히 세익스피어를 애독했던 모양이어서,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음악을 7곡이나 작곡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내용적으로 뛰어나고, 일반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은 환상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이 <로미오와 줄리엣>은 차이코프스키가 모스크바에 정착한 3년째 되는 1869년(29세)에 완성하여 그 이듬해 3월에 그의 은인이자 친구인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차이코프스키에게 이 세익스피어의 대 비극을 바탕으로 한 표제음악을 쓸 것을 권한 사람은 '러시아 5인조'의 한 사람인 발라키레프였다. 차이코프스키의 친구인 카시킨에 의하면 발라키레프 자신도 이 제재에 마음이 끌렸는지 그는 마치 잘 알고 있는 작품을 이야기하듯 면밀하게 그 구상을 이야기했다. 그 것이 계기가 되어 젊은 차이코프스키의 환상은 불붙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수 개월 동안 차이코프스키는 숙고를 거듭하다가 9월에서 11월 중순 사이에 이 곡을 완성시켰다. 초연 때의 평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5인조들로 나가고 있는 '발라키레프적(的)'작품으로서 이 곡을 매우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그의 53세의 생애를 끝마칠 때까지 이 그룹의 '6번째' 인물은 되지 않았다. 초연 후 차이코프스키는 발라키레프가 지적한 몇 군데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이 곡을 2회에 걸쳐 수정하여 지금과 같은 결정반을 만들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전기를 쓴 바 있는 쿠닌은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이 <로미오와 줄리엣>이 없었던들 1870년대의 표제적 교향 작품은 물론이요, 만년 시대의 웅장한 교향곡도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곡은 4개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처음 서주 부분은 안단테 논 탄토 콰지 모데라토, f#단조, 4분의 4박자. 소나타 형식의 주부는 알레그로 지우스토 b단조의 제1주제와 Db장조의 제2주제가 나타난다. 그리고 전개부에 들어가면 이미 나왔던 각 주제가 얽혀서 격렬히 전개된 후 재현부는 총주에 의한 제1주제로 시작되어 제2주제가 뒤따른다.

레코드는 카라얀의 연주가 다소 담백한 표현이지만 정공법으로 베를린 필을 구사하여 잘 다듬어진 아름다운 음악으로 완성시켰는데 박력면에서 다소 약한 듯 싶다. 그런데 그의 교묘한 연출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어 작품이 가지는 로맨틱한 극성을 더욱 깊게 하고, 깊이와 폭넓은 연주를 들려준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스케일이 클 뿐 아니라 드라마틱하게 이 곡을 이끌어 나간다. 또한 각 주제의 콘트라베이스를 확실하게 잡아, 쉽게 스토리의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명연이라 할 만하다. 뮌시의 녹음은 조금 오래되었지만 대단한 열연이다. 박력면에서 이렇게 힘찬 연주는 없으며, 중후하고 심포닉한 보스톤 심포니의 연주도 놀랍다.

당시 16세이던 레너드 화이팅과 15세이던 올리비아 핫세를 캐스팅 해 만든 <로미오와 줄리엣>은 개봉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화제에 올랐다. 특히 줄리엣 역의 올리비아 핫세는 특유의 청초한 이미지와 청순가련한 연기 덕에 일약 아이돌 스타로 급부상했다. 1968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촬영상과 음악상(니노 로타)을 수상한 화제작이다.

 

차이코프스키 [Pyotr Ilich Chaikovskii 1840∼1893]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광산촌에서 태어났. 그의 아버지는 광산의 총감독이었으며 그의 가족관계로는 위로 이복누이와 형 또 아래에 누이동생과 동생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유년 시대를 보냈다. 그는 어려서 가정교사에게 불어와 독어를 배웠는데 그는 그녀를 잘 이해하고 따라서 그녀와의 이별이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 이별의 충격은 페테르스부르크의 법률학교 기숙사 생활에서 더욱 견딜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동성애에 빠지게 된다.

1848년경 콜레라로 어머니가 죽은 뒤 작곡을 시작하였고 감정의 배출구로 음악을 쓰는 습관이 몸에 붙이게 되었다. 1855년 그는 피아노 교사 루돌프 퀸딩거에게 레슨은 받기 시작하였다. 1863년 그는 음악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1859년 이후 그는 법무성에서 근무하는 한편 음악공부도 하는 이중생활도 하게 되었다. 새로운 사상 특히 페테레스부르크의 밀리 발라게레프를 둘러싼 인물들이 보급시키고 있던 국민주의 음악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을 만나 그의 최초의 교향곡 G단조의 작품을 쓰는 일에 착수한다, 이 <겨울날의 환상>은 부제에서 나타났듯이 로맨틱한 기분을 암시하며 4악장 중 3개의 악장에 민족적인 주제를 쓰고 있지만 이 때문에 교향곡에 자전적인 요소가 손상되고 있지는 않다.

그는 1867년 <폭풍우>를 작곡했을 때 베를리오즈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다음해에 발라키레프와 그의 일파들과도 알게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무소그르스키,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있었다. 발라키레프는 젊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적 환상곡을 비판하였으며 관현악작품인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형성에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는 발라키레프 일파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냈는데, 그 까닭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작곡과 개정에 발라키레프가 도움을 주기는 했어도 차이코프스키는 발라키레프의 페테르스부르크의 문하생과는 달리 음악원에서 전문적으로 공부한 음악가였으며 그의 제1교향곡에서 이미 명백해진 바와 같이 그의 작품은 서구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러시아 민요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고 그래서 현악사중주 1번의 느린 악장에 우크라이나 노래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는 열렬한 국민주의자는 아니었다.

우크라이나 선율들은 C단조의 제2교향곡에서도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op.17인 이 작품은 <小 러시아>라는 별명도 갖고 있습니다. 1874-1878년 사이에 차이코프스키 생애에 가장 많은 걸작이 나온다. 이때 그는 동성연애자로서의 죄악감에 더욱 시달리게 된 그는 자기가 위기를 향해 가고 있음을 알자, 결혼만이 자기 문제의 해결 방도인양 다짜고짜 결혼으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역점과 비극적인 억압감을 그는 오로지 음악에만 쏟아 넣었던 것이다. Bb단조의 제1피아노 협주곡 op.23은 어느 정도 감정이 동요하고 있던 시기와 국민주의적인 시기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할 수 있다. 국민주의적 면은 양쪽 끝악장에 우크라이나 주제를 다시 쓰고 있는 것에 나타나 있다.

그는 폰 메크 부인과 교제한 후 약 10년간 집에 틀어박힌 생활을 했다. 작곡을 하고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가르치고 휴가 때에는 서유럽에 가서 장기간 체재하면서 작곡가들을 방문한다던가 새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메크 부인과 관계가 끊어진 다음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콜레라에 전염되었다는 것이 그의 사인으로 알려져 왔고 지금도 많은 그의 전기에서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979년 소련의 문화성에서는 면밀한 고증을 통해 그의 죽음이 독살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를 탐닉하고 있다는 설이 점점 퍼지자 법률학교 시절의 동급생이었던 법관들은 그 스캔들이 자신들에게 파급될 것을 우려하여 그에게 스스로 독배를 마시도록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음원출처: 전남중등음악사랑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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