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트리음악 명예의 전당에 있는 Jimmie Rodgers의 구리 명판에는 "모든 것을 시작한 사람으서 컨트리음악 분야에서 그의
이름은 맨 앞에 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노래하는 열차 제동수"와 "미시시피 블루 요
들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지미 로저스는 음반 활동 경력이 결핵으로 인하여 6년에 불과하지만 미국 전역에 걸친 컨트리음악의 첫번째 스타였으며,Hank Snow, Ernest Tubb, Hank Williams 로부터 Lefty Frizzell과 Merle Haggard에 이르기까지 후대의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컨트리음악가들이 마운턴뮤직에만 집착해 있을 그 시대에 Jimmie는 마운턴뮤직과 재즈,블루스,팝 및 카우보이음악을 융합하면서, 힛트곡"TB Blues," "Waiting for a Train," "Travelin' Blues," "Train Whistle Blues,"등을 비롯해서 그의 독창적인 Blue Yodel 13시리즈를 스스로 작곡하여 발표하였다.지미의 요들시리즈는 녹음 초반인 1927년 부터 그가 세상을 떠났던 1933년까지 약 6년에 걸쳐 발표하였는데,12bar블루스형식에 그의 독창적인 요들 후렴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지미 로저스는 1897년 9월 8일 미국 미시시피주 메르디안에서 3형제 중에 막내로 태어났다.7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종종 학교를 빼먹을 정도로 연약한 아이였다.아버지는 철도회사 현장 책임자로 있었기 때문에 지미는 미시시피 지역의 여러 친척집을 전전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교사였던 이모에게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접한 이후로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엔터테이너적인 기질을 타고났던 지미는 12살 때 지역 장기자랑대회에서 "Steamboat Bill"을 불러 수상한 후 인기를 실감하며,자신의 길거리 텐트 쇼를 계획하며 길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하지만 아버지 한테 붙들려서 이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또다시 가출하여 떠돌이 약장수 쇼(medicine show)에 가담하게 되었다.
약장수 쇼의 낭만은 아버지가 또다시 붙잡으로 옮으로써 끝이 났고,학교로 갈건지 철도로 갈건지의 선택만이 주어졌다.지미는 결국 사환(waterboy)으로 아버지를 따라 철도회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흑인 철도 노동자들로부터 기타와 밴조 연주 및 블루스를 배웠다고 한다.이후 약 10년간 서,남해안을 따라 제동수(Brakeman)를 비롯해 여러 보직을 거치면서 철도일을 했다.1917년 5월 만난지 몇 주만에 Sandra Kelly와 결혼하여 그 해 가을에 헤어졌고,1920년 4월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Carrie Williamson과 재혼하였다.
1924년 27세의 나이에 결핵에 걸려 철도일을 잠시 그만두게 되어,그가 좋아했던 연예활동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떠돌이 로드쇼를 조직하여 동남부를 돌며 공연을 펼쳤는데,허리케인이 덮쳐 텐트를 잃게 되자 할 수없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이에미에서 플로리다 동부 연안을 따라 제동수로서 다시 철도일에 복귀하였지만 결핵으로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애리조나주 투싼에 머물면서 전철원으로 잠시 일하다가 1927년 메리디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처가의 부모들과 잠시 동안 함께 거주하다가 그 해에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애쉬빌로 갔다.그기서 지미는 또다른 철도일을 하려고 계획했지만 그 일자리를 잡을 수 없을 만큼 건강이 나빠져 있었다.하는 수 없이 수위,택시기사등을 겸해서 그가 찾을 수 있는 노래하는 job이면 무엇이거나 하려 했다.
그리하여 애쉬빌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인 WWNC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 Tenneva Ramblers라는 현악 밴드를 만나 그들로 하여금 지미의 백 보컬이 되도록 설득하여 "Jimmie Rodgers Entertainers"라는 프로에 매주 출연하게 되었다.
그 무렵 Victor레코드사의 대표였던 Ralph Peer는 상업목적으로 음반을 제작 판매할 계획으로 지역 음악인들을 구인 하는 광고를 내게 되었다.그 동안 취미로 음악을 하였던 사람들이 자신이 즐기는 음악으로 돈을 벌수 있다는 생각에 수많은 지역 음악인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지미 로저스도 그의 백보컬 그룹 Tenneva Ramblers와 함께 1927년 8월 3일 Bristol에 도착했다. 그 날 늦게 그들은 빈 창고에서 Peer에게 오디션을 받고 다음 날 녹음 하기로 합의하였다.그러나 그날 밤 레코드에 누구의 이름을 먼저 표기할 것인가에 대하여 지미와 백보컬 그룹원들간에 심한 논쟁이 벌어졌고 다음날 그들은 나타나지 않아서 결국 지미 혼자서 솔로 아티스트로 녹음해야 했다.
지미는 그가 출연하고 있던 라디오 프로의 signal음악인 "T for Texas"를 녹음하고 싶었지만 Peer가 거절했으므로 "The Soldier's Sweetheart" 와 "Sleep, Baby, Sleep" 두 곡을 녹음하고 100달러를 받았다.그 해 11월에 다시 4곡을 녹음하였는데,그 중에 "Blue Yodel"로 제목을 바꾼 "T for Texas"가 그 당시 100만부 이상 판매된 몇 안되는 컨트리 음반 중에 하나가 될 정도로 빅-힛트 하게 되었다.
곧이어 지미는 아내와 함께 워싱턴으로 가서 the Singing Brakeman 이라는 정기쇼에 매주 출연하게 되었다.
*The Soldier's Sweetheart(1927) - (첫번째 녹음곡)
한편, 콘서트가 호황을 누렸고,음반 판매량이 지속적으로 높아지면서 지미는 명실상부한 스타로 자리를 잡게 됨에 따라 1929년
"The Singing Brakeman"이라는 영화를 제작하면서 여러 노래들을 녹음하여 전국 순회공연에 나서기도 했다.인기는 높아가고 수입도 많았지만 그의 건강은 공연 스트레스로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공황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적십자 기금 마련을 위한 여러 공연을 Will Rogers(엔터테이너)와 함께 추진하는 한편 음악 녹음 작업을 계속해 나가면서 텍사스에 큰집을 짓는 등 그의 일을 계속해 나갔다.1931년 중반에는 대공황의 여파가 지미에게도 미쳐,콘서트 예약은 급속하게 감소하였고,레코드판매는 중지되었다.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미는 녹음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한편으로는 대공황으로 또 한편으로는 악화된 건강으로 인하여 1931년과 32년에 지미는 콘서트 횟수를 줄여야만 하였고 녹음 작업과 여러 영화 계획도 취소해야만 되었다.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발을 신은 채 죽고 싶다"고 아내에게 말하면서
공연 중단을 거부했다.
*My Little Old Home Down in New Orleans (1928)
그가 세상을 떠났던 1933년 무렵, 그 동안 벌었던 돈이 바닥 났으므로 생계를 위하여 지미는 어디서나 무슨 공연이든지 간에 해야만 했다.
텍사스의 샌 안토니오에 있는 어느 라디오 쇼에 한 동안 출연하였는데,그 해 2월에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가야만 했다. 그에게 죽음이 가까이 와있다는 걸 느끼면서 5월에 또 한번 녹음 스케쥴을 잡도록 Peer를 설득하였다.
이 번의 녹음세션으로 그는 가족들이 살 수 있는 돈을 마련하려 하였다. 간호사를 대동하여 녹음하면서 중간 중간에 침대에 누워 쉬어야만 했다.
이 번 녹음세션을 지미는 홀로 시작하여 첫날 4곡을 녹음하였다. 하루를 쉬고 스튜디오에 돌아왔을 때는 앉아서 녹음해야만 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있었고, 연습해온 곡들에 대한 녹음을 마칠 수 있게 기운을 회복할 목적으로 곧 호텔로 돌아가서 쉬어야만 했다
며칠을 쉬고 스튜디오로 되돌아왔을 때 녹음기사는 지미를 도울 두 명의 세션 뮤지션을 고용해 두고 있었다.
"Mississippi Delta Blues"등 몇 곡을 그들과 함께 녹음 하였다.마지막 녹음 곡인 "Years Ago"는 지미가 혼자 하기로 결정하였다.
*The Land of My Boyhood Dreams(1929)
녹음세션이 끝나고 이틀 후인 1933년 5월 26일 지미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에 의한 폐출혈로 세상을 떠고 말았다.
사후에 시신은 고향인 메르디안으로 열차의 수화물칸에 실려 운구되었는데, 운구 열차는 메르디안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경적을 울렸고,수많은 컨트리팬들이 시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떠나는 뮤지션에게 경의를 표하는 수많은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며칠 뒤 지미는 묻히게 되었다.
*Long Tall Mama Blues(1932) - (블루그래스에 영향을 준 곡)
지미 로저스의 영향은 1930년대에 한정되지 않았다.오히려 컨트리음악의 역사를 통하여 Hank Williams로 부터 Merle Haggard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 까지 거의 메아리는 계속해서 들려지고 있는 것이다. 1961년 초대 컨트리음악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1970년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1986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1953년 이래에,지미가 세상을 떠났던 5월 이면 해마다 고향 메르디안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
1969년에는 컨트리 아티스트 Merle Haggard가 '위대한 지미 로저스의 노래를 부르다'라는 부제를 붙인 Double앨범"Same Train, A Different Time"을 발표한 적이 있고, 지미의 "Blue Yodel No. 1 (T for Texas)"은 Lynyrd Skynyrd의 라이브 앨범에 커버되어 수록되기도 했다.
1978년 미국 우편 서비스는 공연예술의 장기간 시리즈, 그 첫번째로 지미 로저스의 우표를 발행하였다.-웹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