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꼭대기에서 곤두박질치다
무애스님은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 지독한 경험주의자였다. 세상에 신비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경험에 의해 알 수 있고 또 풀 수도 있다고 보셨다. 필자가 4년 동안 스님과 함께 기거하면서 배운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을 가르치는 데도 무애스님은 경험주의자답게 가르치셨다.
스님과 함께 기거하던 첫 해 가을에 스님이 이상한 행동을 보여주셨다. 요즘 무협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큰 소나무 꼭대기로 올라가시더니 부러지지 않을 만한 굵기의 가지에 앉으셨다. 처음에는 살살 구르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세게 구르셨다. 소나무 가지가 위로 아래로 크게 철렁거렸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훌쩍 날아 다른 소나무 가지 위에 사뿐히 앉으셨다.
몇 번을 이렇게 하시더니 내려오셨다. 참으로 신기하게 보였다. 뭔가 설명이 있을 것 같았는데,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얼마 후에 또 똑같은 것을 보여주셨다. 나는 첫 번 볼 때에는 어안이 벙벙해서 입만 벌리고 보았지만, 이번에는 스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유심하게 살펴보았다. 첫해 가을 동안에 서너 번은 스님께서 이 소나무에서 저 소나무로 날아다니는 것을 본 것 같다. 몇 번 보니 필자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이 날래기로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던 때였다.
겨울이 지나고 어느 봄날 스님께 나도 한번 해 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스님께서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스님이 올라가신 적이 있는 소나무 가지 위에 올라가 살살 구르다가 점점 더 세차게 굴렀다. 가지가 가장 밑으로 내려갔다고 생각되는 순간 힘을 최대로 주어 굴러 다른 나무의 가지로 날았다. 그 순간 날았다고 생각했는데, 필자는 나무 아래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한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가지와 줄기가 연결되는 지점이 부러져 솔잎과 함께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내 얼굴 위에서 살짝 웃음을 띠고 내려다보고 있으셨다. 나는 속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이놈의 영감쟁이가 남은 아파서 죽겠는데, 무엇이 좋다고 혼자서 웃고 지랄이야!’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좀처럼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엉덩이에 허리, 다리까지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 나쁜 놈의 영감쟁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1주일을 누워지내다시피 한 후에야 통증이 가라앉아 겨우 운신을 할 수 있었다. 스님께 어찌 된 연유인지 물어보았다. 스님은 사뿐하게 날았는데, 왜 나는 안 되는 것이냐고. 스님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나무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가을의 나무는 봄부터 성장하면서 영양분을 빨아들여 탄력이 있지만, 겨울에 얼었다가 봄에 녹아 물이 오르기 시작한 나무는 탄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탄력이 하나도 없는 나무 위에서 한껏 힘을 주니 꺾이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는 말씀이었다.
그러면 왜 말리지 않았냐고 따졌다. 내가 떨어질 것을 뻔히 알고도 무책임하게 올라가 보라고 한 것은 무슨 나쁜 심사가 있어서가 아니냐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느냐고 몰아쳤다. 나는 정말로 화가 났다. 분명하게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는 사람은 정말로 나쁜 사람이다.
스님은 여전히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너는 죽지 않았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잘된 것이고, 호되게 당했으니까 다음부터는 봄에는 나무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기가 찼지만, 스님 말씀에 전혀 일리가 없지도 않은 것 같았다.
스님은 이런 분이었다. 머리로 하는 경험은 진정한 경험이 아니라고 보시는 분이었다. 몸으로 겪어 보면 확실하게 알지만, 머리로 알면 호기심이 발동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일도 해 볼 수 있게 된다고 보시는 분이었다. 몸으로 겪은 경험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경험이라고 보시는 분이었다.
삶지 않은 독버섯은 씹어도 뱉어 낸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픈 사람이 오거나 어디 아픈 사람이 있으니 와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를 제외하면 스님께서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이렇게 한가할 때에는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는 게 중요한 일과였다. 덕분에 필자도 힌약에 대해서는 조금은 귀동냥으로 배웠다. 어느 날 약초를 캐다가 보랏빛으로 아주 아름다운 열매를 발견했다. 앵두보다 조금 작았는데, 필자는 그 아름다운 빛깔에 황홀해졌고, 먹고 싶은 마음까지 동했다.
스님께 여쭈어 보았다. “이것 먹어도 되는 거예요?” 스님의 대답은 이때에도 역시 간단했다. “먹어 봐.”
열매를 두 개 입에 넣고 씹었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서 씹은 열매를 뱉어 냈다. 입안을 쏘았다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았다. 둔기로 입안을 강타당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입안이 너무 아프니 저절로 뱉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금방 입천장에 물집이 생기고 입이 퉁퉁 부었다.
이때에도 화가 났다. “아니, 이런 열매를 먹어 보라고 하시다니요?” 스님의 답변은 이때에도 간단했다. “죽지 않았잖아.”
맞다. 죽지는 않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이후 1주일간은 입안이 헐어 상당히 고생을 했다.
스님이 설명을 해 주셨다. 독이 있는 열매나 식물, 심지어는 독버섯까지도 그냥 씹으면 절대로 삼키지 않게 돼 있다고 하셨다. 그 독성을 우리 입이 맛으로 알아채고 바로 뱉어 내게 돼 있다는 것이었다. 이게 자연의 섭리라는 것이었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이렇게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삶으면 입이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에 먹고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독버섯을 끓여 먹고 죽었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생으로 먹고 죽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인공이 가해질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던 자신을 보호하는 능력을 잃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스님이 필자를 가르치실 때에는 모두 직접 몸으로 체험함으로써 배우도록 하셨다. 때문에 몇 번 곤경에 빠져 고생한 적도 있지만, 그 덕분에 확실하게 몸으로 익히게 되기도 했다.
물론 스님께서 철저하게 경험에 의존해서 가르치셨기 때문에 필자도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못했다. 모든 가르침이 개별적인 사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한계는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필자는 만 가지 병 각각에 대해서는 답을 줄 수 있지만, 이것을 전체적으로 체계화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체계화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몸으로 느끼는 공부를 하자
우리 선현들은 원래 마음과 몸은 하나라고 보았다. 그래서 둘을 합쳐 ‘맘’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 둘은 하나이면서도 둘이었고, 또 둘이면서도 하나였다. 원효대사의 말씀대로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였다. 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해서는 추후에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하고, 어쨌든 그래서 선현들은 공부를 크게 마음공부와 몸공부로 나누어서 보았다. 그러나 이 둘은 또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공부가 몸공부였고 몸공부가 마음공부였다.
그런데 서양 문명이 이 사회의 주류 문명이 되면서부터 마음공부와 몸공부는 뒷전으로 밀리고, 지식공부가 공부의 모든 것으로 바뀌었다. 지식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소위 ‘객관적인’ 것이다. 이러한 지식의 습득은 사람들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무한경쟁의 세계에서 싸워 이기는 데 큰 도움이 돼 왔다.
그러나 삶이 편리해진 반면 사람들은 예전에 없던 현대병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경쟁에서 이겨 봐야 삶의 질은 높아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마음공부와 몸공부를 되살려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질 높은 삶을 만들어 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몸살림운동은 몸을 건강하게 함으로써 마음까지 열리게 하자는 운동이다. 몸이 쾌적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남들과 싸우지 않고, 오히려 나누면서 그야말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공부는 몸공부에서 시작돼야 한다. 바른 자세를 잡는 법을 제대로 익히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몸공부는 몸으로 느끼는 공부가 돼야 한다. 무애스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몸의 경험을 통해서 자기 몸에 대해 샅샅이 알게 되고 또 스스로 느껴야 한다. 몸이 아프면 내 몸을 전문가에게 맡기고 낫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아! 이것 때문에 아픈 것이구나 스스로 알고, 그러면 스스로 나을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는 많이 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몸을 알면 병을 없앨 수 있는데, 몸을 알 생각은 하지 않고 병만 탓한다. 병은 자기 자신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이 잘못된 자세를 가졌기 때문에 병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병은 자기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몸을 의사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자기 몸에 대해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지게 하는 운동, 이것이 바로 몸살림운동이다.
무애스님은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 지독한 경험주의자였다. 세상에 신비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경험에 의해 알 수 있고 또 풀 수도 있다고 보셨다. 필자가 4년 동안 스님과 함께 기거하면서 배운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을 가르치는 데도 무애스님은 경험주의자답게 가르치셨다.
스님과 함께 기거하던 첫 해 가을에 스님이 이상한 행동을 보여주셨다. 요즘 무협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큰 소나무 꼭대기로 올라가시더니 부러지지 않을 만한 굵기의 가지에 앉으셨다. 처음에는 살살 구르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세게 구르셨다. 소나무 가지가 위로 아래로 크게 철렁거렸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훌쩍 날아 다른 소나무 가지 위에 사뿐히 앉으셨다.
몇 번을 이렇게 하시더니 내려오셨다. 참으로 신기하게 보였다. 뭔가 설명이 있을 것 같았는데,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얼마 후에 또 똑같은 것을 보여주셨다. 나는 첫 번 볼 때에는 어안이 벙벙해서 입만 벌리고 보았지만, 이번에는 스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유심하게 살펴보았다. 첫해 가을 동안에 서너 번은 스님께서 이 소나무에서 저 소나무로 날아다니는 것을 본 것 같다. 몇 번 보니 필자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이 날래기로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던 때였다.
겨울이 지나고 어느 봄날 스님께 나도 한번 해 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스님께서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스님이 올라가신 적이 있는 소나무 가지 위에 올라가 살살 구르다가 점점 더 세차게 굴렀다. 가지가 가장 밑으로 내려갔다고 생각되는 순간 힘을 최대로 주어 굴러 다른 나무의 가지로 날았다. 그 순간 날았다고 생각했는데, 필자는 나무 아래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한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가지와 줄기가 연결되는 지점이 부러져 솔잎과 함께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내 얼굴 위에서 살짝 웃음을 띠고 내려다보고 있으셨다. 나는 속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이놈의 영감쟁이가 남은 아파서 죽겠는데, 무엇이 좋다고 혼자서 웃고 지랄이야!’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좀처럼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엉덩이에 허리, 다리까지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 나쁜 놈의 영감쟁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1주일을 누워지내다시피 한 후에야 통증이 가라앉아 겨우 운신을 할 수 있었다. 스님께 어찌 된 연유인지 물어보았다. 스님은 사뿐하게 날았는데, 왜 나는 안 되는 것이냐고. 스님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나무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가을의 나무는 봄부터 성장하면서 영양분을 빨아들여 탄력이 있지만, 겨울에 얼었다가 봄에 녹아 물이 오르기 시작한 나무는 탄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탄력이 하나도 없는 나무 위에서 한껏 힘을 주니 꺾이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는 말씀이었다.
그러면 왜 말리지 않았냐고 따졌다. 내가 떨어질 것을 뻔히 알고도 무책임하게 올라가 보라고 한 것은 무슨 나쁜 심사가 있어서가 아니냐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느냐고 몰아쳤다. 나는 정말로 화가 났다. 분명하게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는 사람은 정말로 나쁜 사람이다.
스님은 여전히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너는 죽지 않았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잘된 것이고, 호되게 당했으니까 다음부터는 봄에는 나무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기가 찼지만, 스님 말씀에 전혀 일리가 없지도 않은 것 같았다.
스님은 이런 분이었다. 머리로 하는 경험은 진정한 경험이 아니라고 보시는 분이었다. 몸으로 겪어 보면 확실하게 알지만, 머리로 알면 호기심이 발동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일도 해 볼 수 있게 된다고 보시는 분이었다. 몸으로 겪은 경험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경험이라고 보시는 분이었다.
삶지 않은 독버섯은 씹어도 뱉어 낸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픈 사람이 오거나 어디 아픈 사람이 있으니 와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를 제외하면 스님께서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이렇게 한가할 때에는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는 게 중요한 일과였다. 덕분에 필자도 힌약에 대해서는 조금은 귀동냥으로 배웠다. 어느 날 약초를 캐다가 보랏빛으로 아주 아름다운 열매를 발견했다. 앵두보다 조금 작았는데, 필자는 그 아름다운 빛깔에 황홀해졌고, 먹고 싶은 마음까지 동했다.
스님께 여쭈어 보았다. “이것 먹어도 되는 거예요?” 스님의 대답은 이때에도 역시 간단했다. “먹어 봐.”
열매를 두 개 입에 넣고 씹었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서 씹은 열매를 뱉어 냈다. 입안을 쏘았다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았다. 둔기로 입안을 강타당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입안이 너무 아프니 저절로 뱉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금방 입천장에 물집이 생기고 입이 퉁퉁 부었다.
이때에도 화가 났다. “아니, 이런 열매를 먹어 보라고 하시다니요?” 스님의 답변은 이때에도 간단했다. “죽지 않았잖아.”
맞다. 죽지는 않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이후 1주일간은 입안이 헐어 상당히 고생을 했다.
스님이 설명을 해 주셨다. 독이 있는 열매나 식물, 심지어는 독버섯까지도 그냥 씹으면 절대로 삼키지 않게 돼 있다고 하셨다. 그 독성을 우리 입이 맛으로 알아채고 바로 뱉어 내게 돼 있다는 것이었다. 이게 자연의 섭리라는 것이었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이렇게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삶으면 입이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에 먹고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독버섯을 끓여 먹고 죽었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생으로 먹고 죽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인공이 가해질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던 자신을 보호하는 능력을 잃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스님이 필자를 가르치실 때에는 모두 직접 몸으로 체험함으로써 배우도록 하셨다. 때문에 몇 번 곤경에 빠져 고생한 적도 있지만, 그 덕분에 확실하게 몸으로 익히게 되기도 했다.
물론 스님께서 철저하게 경험에 의존해서 가르치셨기 때문에 필자도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못했다. 모든 가르침이 개별적인 사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한계는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필자는 만 가지 병 각각에 대해서는 답을 줄 수 있지만, 이것을 전체적으로 체계화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체계화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몸으로 느끼는 공부를 하자
우리 선현들은 원래 마음과 몸은 하나라고 보았다. 그래서 둘을 합쳐 ‘맘’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 둘은 하나이면서도 둘이었고, 또 둘이면서도 하나였다. 원효대사의 말씀대로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였다. 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해서는 추후에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하고, 어쨌든 그래서 선현들은 공부를 크게 마음공부와 몸공부로 나누어서 보았다. 그러나 이 둘은 또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공부가 몸공부였고 몸공부가 마음공부였다.
그런데 서양 문명이 이 사회의 주류 문명이 되면서부터 마음공부와 몸공부는 뒷전으로 밀리고, 지식공부가 공부의 모든 것으로 바뀌었다. 지식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소위 ‘객관적인’ 것이다. 이러한 지식의 습득은 사람들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무한경쟁의 세계에서 싸워 이기는 데 큰 도움이 돼 왔다.
그러나 삶이 편리해진 반면 사람들은 예전에 없던 현대병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경쟁에서 이겨 봐야 삶의 질은 높아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마음공부와 몸공부를 되살려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질 높은 삶을 만들어 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몸살림운동은 몸을 건강하게 함으로써 마음까지 열리게 하자는 운동이다. 몸이 쾌적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남들과 싸우지 않고, 오히려 나누면서 그야말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공부는 몸공부에서 시작돼야 한다. 바른 자세를 잡는 법을 제대로 익히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몸공부는 몸으로 느끼는 공부가 돼야 한다. 무애스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몸의 경험을 통해서 자기 몸에 대해 샅샅이 알게 되고 또 스스로 느껴야 한다. 몸이 아프면 내 몸을 전문가에게 맡기고 낫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아! 이것 때문에 아픈 것이구나 스스로 알고, 그러면 스스로 나을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는 많이 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몸을 알면 병을 없앨 수 있는데, 몸을 알 생각은 하지 않고 병만 탓한다. 병은 자기 자신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이 잘못된 자세를 가졌기 때문에 병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병은 자기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몸을 의사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자기 몸에 대해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지게 하는 운동, 이것이 바로 몸살림운동이다.
김철/몸살림운동가 |
출처 : 몸살림운동 부산동호회
글쓴이 : 공구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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