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은 명절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이 되면 필자는 귀찮은 심부름을 해야 했다. 당시 많이 쓰이던 광목 포대에 넣은 20kg 정도(지금 그 정도 됐던 것으로 기억된다) 되는 쌀을 지고 가난한 집에 날라다 주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명절날이 며칠 안 남았으면 스님께서는 그 동안 받아서 모아 놓았던 쌀을 비슷한 무게로 맞추어 20개 정도로 나누었다.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정기적인 행사였다.
여기에다 그 동안 모아 놓았던 돈으로 마을 젊은이들이 장에 갈 때 부탁해 사 온 고기를 나누어서 함께 보냈다. 명절날이 돼도 고깃국 한번 먹기 힘든 사람들에게 얼마 안 되는 양이지만 한번 맛이라도 보라는 스님의 배려였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철이 없던 필자는 공연한 일을 맡아서 하게 됐다고 불만이 많았다.
스님께서 집에 계실 때 하루에 찾아오는 사람이 평균하면 5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이들은 대개 곡물을 들고 왔는데, 그 중에서도 쌀이 많았다. 돈을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스님께서는 두말 않고 모두 받아 놓으셨다.
개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감자 같은 것을 들고 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에는 가져온 것에다 감자나 곡물을 더 보태서 주셨다. “이것 아이들이나 먹여!” 하는 말씀과 함께. 스님께서는 찾아오는 사람들의 생활의 정도를 눈에 그리듯이 꿰뚫고 있으셨다. 그러니 고마움의 표시로 가져온 감자일지라도 받으실 수가 없으셨던 것이다. 집에서 아이가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있는데, 고깃국에 흰쌀밥을 배불리 먹어 보는 게 평생의 소원인 아이들이 있는데, 스님께서 어찌 그것을 받으실 수 있었겠는가.
명절날이 다가오면 치르는 연례행사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얘기인 것으로 웃어넘길지도 모르지만, 30년 전만 해도 우리네 생활은 그 정도였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과 고기를 가져다주면, 그들은 1년 중 명절날만이라도 쌀밥도 먹고 떡도 해 먹고 떡국도 끓여 먹고 고깃국도 먹을 수 있었다.
이것 말고도 필자가 귀찮은 심부름을 할 때가 또 있었다. 역시 먹는 것과 관계가 있는 일이었다. 저번에 애를 낳은 그 아주머니 집에 갔다 오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식량도 떨어지고 저번에 주었던 미역도 떨어지고 해서 그 아주머니가 헬쓱해져 있을 것 같으니, 가서 한번 어떤지 보고 미역과 식량도 가져다주고 오라는 것이었다.
이것도 귀찮은 심부름이었지만, 스님의 말씀이니 안 갈 수는 없었다. 갔다 와서 그 아주머니 얼굴 혈색이 좋으니 걱정하시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면, 스님께서는 얼굴이 활짝 펴지며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그렇게도 좋아하셨다.
무애스님은 이런 분이었다. 함께 기거하는 동안 당신에 관한 것은 털끝만큼도 생각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개똥이네 집 사정이 안 좋은데 굶는 것은 아닌지, 쇠똥이네 할아버지 천식은 좀 가라앉았는지, 영희네 엄마 미역은 떨어지지 않았는지, 늘 이런 걱정만 하고 계셨다. 스님의 마음속에서 당신은 없어지고 가엾은 중생들만 꽉 들어차 살고 있었다. 스님의 삶이 바로 중생의 삶이었다.
스님과의 이별
이런 스님을 모시고 4년 동안이나 살았음에도 당시에는 스님의 이러한 마음을 별로 알아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러나 뒤늦게 철이 들려는 것인지, 이제야 스님의 흉내라도 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 현재 필자의 모양이다. 스님의 10분의 1이라도 닮고 싶다는 게 필자의 현재 소망이다.
이 몸살림운동을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익힐 수 있도록 전국적으로 퍼지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돈과 시간을 별로 안 들이고도 사람들이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어느 정도의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필자는 죽어 스님을 만났을 때 드릴 말씀이 있을 것 같다. 이 망나니가 그래도 조금은 일을 하고 왔습니다, 하고.
스님과의 이별은 생각지도 않게 다가왔다. 스님과 기거한 지 4년 조금 넘은 어느 날, 석유는 다 떨어져 가는데 읍내에 나가는 젊은이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필자가 장에 가서 사와야 했다. 그런데 이것이 스님과의 마지막 인연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읍내에서 석유를 사고 있는데 경찰이 들이닥쳤다. 필자를 간첩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당시 필자의 몰골과 옷차림은 그렇게 오인을 받기에 충분했다. 산 속에서 살면서 수염과 머리는 깎지 않아 더부룩했고, 옷은 거의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런 몰골과 옷차림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필자의 모양새를 보고 읍내 사람들이 간첩이 나타났다고 신고를 했던 것이다.
결국 간첩이 아닌 것은 밝혀졌지만, 신원조회를 해 본 결과 민방위법 위반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바로 서울로 압송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4년간 이곳 진부의 산속 움집에 내려와 있는 동안 훈련을 받지 않았으니, 바로 조회에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포장이 안 돼 있는 신작로를 따라 덜컹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스님과의 만남은 이렇게 너무나도 허망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나를 찾을 생각일랑 하지를 말라
스님께서는 이런 이별을 예상이라도 하셨는지, 미리 필자에게 말씀을 해 두신 적이 있다.
“나중에 내가 죽더라도 아예 나를 찾을 생각일랑 하지를 말라. 네게 하지수(下地數)를 가르쳤는데, 너도 어느 정도 이치를 깨달은 것 같다. 짐승은 제 죽을 날을 알고 준비를 하는데, 사람도 자기가 죽을 날을 알 수 있다. 나는 내가 죽을 날을 잘 알고 있으니, 때가 되면 죽을 준비를 할 것이다. 인적이 없는 곳에 가서 내가 누워 있을 수 있을 만큼만 땅을 파고 누워 있을 것이다. 누워 있다 보면 죽을 것이고, 죽어 있으면 짐승이 와서 먹기도 하고 구더기가 끼기도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 낙엽도 쌓이고 흙도 덮이면 평평한 무덤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네가 아무리 나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예 찾을 생각일랑 하지를 말라.”
지금 생각해 보면, 스님께서는 자연에서 나와 자연에서 나온 것을 먹고 살았으니, 모든 것을 자연에 되돌려주고 자연으로 돌아가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이름 없이 세상에 왔으니, 똑같이 이름 없이 자연으로 돌아가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무덤을 쓰고 그 앞에다 비석을 세우고 이름 몇 자 남기는 것조차 허망한 일로 보셨던 것 같다.
보통 스님들께서 법명으로 많이 쓰는 무애는 끝을 뜻하는 애 자를 써서 無涯라 하여 한없이 넓음을 뜻하는데, 무애스님께서 쓰시던 법명은 그것이 아니라 사랑 애 자를 써서 無愛였다. 사랑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명과 달리 스님만큼 가없는 사랑을 펼치신 분을 필자는 지금까지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다. 필자에게는 그림자조차 짓지 말고 살라고 무영(無影)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당시 필자는 무례하게도 스님을 “영감!”이라 부르기도 하고 심부름을 시키면 툴툴거리기도 했지만, 스님께서는 필자의 이러한 행동을 조금도 탓하지 않고 항상 웃는 얼굴로 받아 주셨다. 마치 이 드넓은 자연이 모든 생명체가 먹고 먹히며 싸우면서 말썽을 부려도 조용히 감싸 주듯이 스님도 그러하셨던 것이다.
이후 필자는 옛날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 또다시 망나니처럼 살았다. 스님께 배운 인술을 이용해서 돈을 벌기도 하고 사치를 부리기도 했다. 특히 하와이로 이민 가서는 발이 접질려 걷지 못하는 일본인 신혼부부 중 신부를 그 자리에서 고쳐 주자, 이것이 일본에 소문이 나 초청을 받게 되면서부터 제법 큰 돈을 손에 만질 수 있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초청을 받아서 가면 2박3일 정도 머물면서 교정을 해 주었는데, 그때마다 2~3만 불 정도의 소득이 생겼다.
이때 필자에게 뜻하지 않은 사건이 생겼다. 1996년의 어느 날 마침 차를 몰고 가는 중이었는데, 건너편에서 딸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가니 딸의 발뼈가 부러져 위로 하얀 뼈가 위로 솟아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소름이 끼치는 모습이었다.
아차 싶었다. 이제 업보가 돌아오는구나! 내 잘못이 딸에게 돌아가는구나!
스님께서는 필자에게 절대로 먹을 것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너는 절대로 굶지 않을 것이니, 돈 벌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냥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살면 그걸로 족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필자는 돈을 추구하고 방탕하게 살아왔다. 이제 스님께서 경고를 하시는 것인가 보다. 더 이상 이렇게 살면,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딸에게 이제 더 어떤 심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제는 스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는 동안에 또 어떤 업보를 받을지 모른다. 이때부터 한국으로 돌아가 몸살림운동(2004년 9월 이전에는 活禪이라는 이름을 가졌었다)을 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한국에 돌아온 지 7년이 조금 넘은 것 같다.
사람들은 필자의 이런 생각에 동의하?? 않을 수도 있다. 순진하게 무슨 업보 같은 것을 믿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무애스님과 4년 동안 맺은 인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 지금도 마음이 간절하면 무애스님께서 꿈에 나타나 서두르지 말라고 타이르기도 하고, 이렇게 하는 게 좋다고 자상하게 사랑으로 가르쳐 주시기도 한다.
필자는 진심으로 무애스님께 감사를 드리며 살고 있다. 스님과의 만남의 인연이 없었다면 필자는 옛날의 망나니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몸살림운동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필자의 삶은 행복하다. 이것은 오로지 무애스님께서 주신 사랑의 선물이다.
이제까지는 경험주의자 무애스님으로부터 어떻게 배웠는가에 대해서 얘기해 왔다. 다음 주부터는 무엇을 배웠는가에 대해 ‘바른 자세’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부터 시작해서 몸살림 이야기의 여행을 계속해 보기로 하겠다.<계속>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이 되면 필자는 귀찮은 심부름을 해야 했다. 당시 많이 쓰이던 광목 포대에 넣은 20kg 정도(지금 그 정도 됐던 것으로 기억된다) 되는 쌀을 지고 가난한 집에 날라다 주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명절날이 며칠 안 남았으면 스님께서는 그 동안 받아서 모아 놓았던 쌀을 비슷한 무게로 맞추어 20개 정도로 나누었다.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정기적인 행사였다.
여기에다 그 동안 모아 놓았던 돈으로 마을 젊은이들이 장에 갈 때 부탁해 사 온 고기를 나누어서 함께 보냈다. 명절날이 돼도 고깃국 한번 먹기 힘든 사람들에게 얼마 안 되는 양이지만 한번 맛이라도 보라는 스님의 배려였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철이 없던 필자는 공연한 일을 맡아서 하게 됐다고 불만이 많았다.
스님께서 집에 계실 때 하루에 찾아오는 사람이 평균하면 5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이들은 대개 곡물을 들고 왔는데, 그 중에서도 쌀이 많았다. 돈을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스님께서는 두말 않고 모두 받아 놓으셨다.
개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감자 같은 것을 들고 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에는 가져온 것에다 감자나 곡물을 더 보태서 주셨다. “이것 아이들이나 먹여!” 하는 말씀과 함께. 스님께서는 찾아오는 사람들의 생활의 정도를 눈에 그리듯이 꿰뚫고 있으셨다. 그러니 고마움의 표시로 가져온 감자일지라도 받으실 수가 없으셨던 것이다. 집에서 아이가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있는데, 고깃국에 흰쌀밥을 배불리 먹어 보는 게 평생의 소원인 아이들이 있는데, 스님께서 어찌 그것을 받으실 수 있었겠는가.
명절날이 다가오면 치르는 연례행사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얘기인 것으로 웃어넘길지도 모르지만, 30년 전만 해도 우리네 생활은 그 정도였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과 고기를 가져다주면, 그들은 1년 중 명절날만이라도 쌀밥도 먹고 떡도 해 먹고 떡국도 끓여 먹고 고깃국도 먹을 수 있었다.
이것 말고도 필자가 귀찮은 심부름을 할 때가 또 있었다. 역시 먹는 것과 관계가 있는 일이었다. 저번에 애를 낳은 그 아주머니 집에 갔다 오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식량도 떨어지고 저번에 주었던 미역도 떨어지고 해서 그 아주머니가 헬쓱해져 있을 것 같으니, 가서 한번 어떤지 보고 미역과 식량도 가져다주고 오라는 것이었다.
이것도 귀찮은 심부름이었지만, 스님의 말씀이니 안 갈 수는 없었다. 갔다 와서 그 아주머니 얼굴 혈색이 좋으니 걱정하시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면, 스님께서는 얼굴이 활짝 펴지며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그렇게도 좋아하셨다.
무애스님은 이런 분이었다. 함께 기거하는 동안 당신에 관한 것은 털끝만큼도 생각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개똥이네 집 사정이 안 좋은데 굶는 것은 아닌지, 쇠똥이네 할아버지 천식은 좀 가라앉았는지, 영희네 엄마 미역은 떨어지지 않았는지, 늘 이런 걱정만 하고 계셨다. 스님의 마음속에서 당신은 없어지고 가엾은 중생들만 꽉 들어차 살고 있었다. 스님의 삶이 바로 중생의 삶이었다.
스님과의 이별
이런 스님을 모시고 4년 동안이나 살았음에도 당시에는 스님의 이러한 마음을 별로 알아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러나 뒤늦게 철이 들려는 것인지, 이제야 스님의 흉내라도 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 현재 필자의 모양이다. 스님의 10분의 1이라도 닮고 싶다는 게 필자의 현재 소망이다.
이 몸살림운동을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익힐 수 있도록 전국적으로 퍼지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돈과 시간을 별로 안 들이고도 사람들이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어느 정도의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필자는 죽어 스님을 만났을 때 드릴 말씀이 있을 것 같다. 이 망나니가 그래도 조금은 일을 하고 왔습니다, 하고.
스님과의 이별은 생각지도 않게 다가왔다. 스님과 기거한 지 4년 조금 넘은 어느 날, 석유는 다 떨어져 가는데 읍내에 나가는 젊은이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필자가 장에 가서 사와야 했다. 그런데 이것이 스님과의 마지막 인연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읍내에서 석유를 사고 있는데 경찰이 들이닥쳤다. 필자를 간첩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당시 필자의 몰골과 옷차림은 그렇게 오인을 받기에 충분했다. 산 속에서 살면서 수염과 머리는 깎지 않아 더부룩했고, 옷은 거의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런 몰골과 옷차림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필자의 모양새를 보고 읍내 사람들이 간첩이 나타났다고 신고를 했던 것이다.
결국 간첩이 아닌 것은 밝혀졌지만, 신원조회를 해 본 결과 민방위법 위반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바로 서울로 압송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4년간 이곳 진부의 산속 움집에 내려와 있는 동안 훈련을 받지 않았으니, 바로 조회에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포장이 안 돼 있는 신작로를 따라 덜컹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스님과의 만남은 이렇게 너무나도 허망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나를 찾을 생각일랑 하지를 말라
스님께서는 이런 이별을 예상이라도 하셨는지, 미리 필자에게 말씀을 해 두신 적이 있다.
“나중에 내가 죽더라도 아예 나를 찾을 생각일랑 하지를 말라. 네게 하지수(下地數)를 가르쳤는데, 너도 어느 정도 이치를 깨달은 것 같다. 짐승은 제 죽을 날을 알고 준비를 하는데, 사람도 자기가 죽을 날을 알 수 있다. 나는 내가 죽을 날을 잘 알고 있으니, 때가 되면 죽을 준비를 할 것이다. 인적이 없는 곳에 가서 내가 누워 있을 수 있을 만큼만 땅을 파고 누워 있을 것이다. 누워 있다 보면 죽을 것이고, 죽어 있으면 짐승이 와서 먹기도 하고 구더기가 끼기도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 낙엽도 쌓이고 흙도 덮이면 평평한 무덤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네가 아무리 나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예 찾을 생각일랑 하지를 말라.”
지금 생각해 보면, 스님께서는 자연에서 나와 자연에서 나온 것을 먹고 살았으니, 모든 것을 자연에 되돌려주고 자연으로 돌아가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이름 없이 세상에 왔으니, 똑같이 이름 없이 자연으로 돌아가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무덤을 쓰고 그 앞에다 비석을 세우고 이름 몇 자 남기는 것조차 허망한 일로 보셨던 것 같다.
보통 스님들께서 법명으로 많이 쓰는 무애는 끝을 뜻하는 애 자를 써서 無涯라 하여 한없이 넓음을 뜻하는데, 무애스님께서 쓰시던 법명은 그것이 아니라 사랑 애 자를 써서 無愛였다. 사랑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명과 달리 스님만큼 가없는 사랑을 펼치신 분을 필자는 지금까지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다. 필자에게는 그림자조차 짓지 말고 살라고 무영(無影)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당시 필자는 무례하게도 스님을 “영감!”이라 부르기도 하고 심부름을 시키면 툴툴거리기도 했지만, 스님께서는 필자의 이러한 행동을 조금도 탓하지 않고 항상 웃는 얼굴로 받아 주셨다. 마치 이 드넓은 자연이 모든 생명체가 먹고 먹히며 싸우면서 말썽을 부려도 조용히 감싸 주듯이 스님도 그러하셨던 것이다.
이후 필자는 옛날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 또다시 망나니처럼 살았다. 스님께 배운 인술을 이용해서 돈을 벌기도 하고 사치를 부리기도 했다. 특히 하와이로 이민 가서는 발이 접질려 걷지 못하는 일본인 신혼부부 중 신부를 그 자리에서 고쳐 주자, 이것이 일본에 소문이 나 초청을 받게 되면서부터 제법 큰 돈을 손에 만질 수 있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초청을 받아서 가면 2박3일 정도 머물면서 교정을 해 주었는데, 그때마다 2~3만 불 정도의 소득이 생겼다.
이때 필자에게 뜻하지 않은 사건이 생겼다. 1996년의 어느 날 마침 차를 몰고 가는 중이었는데, 건너편에서 딸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가니 딸의 발뼈가 부러져 위로 하얀 뼈가 위로 솟아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소름이 끼치는 모습이었다.
아차 싶었다. 이제 업보가 돌아오는구나! 내 잘못이 딸에게 돌아가는구나!
스님께서는 필자에게 절대로 먹을 것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너는 절대로 굶지 않을 것이니, 돈 벌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냥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살면 그걸로 족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필자는 돈을 추구하고 방탕하게 살아왔다. 이제 스님께서 경고를 하시는 것인가 보다. 더 이상 이렇게 살면,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딸에게 이제 더 어떤 심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제는 스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는 동안에 또 어떤 업보를 받을지 모른다. 이때부터 한국으로 돌아가 몸살림운동(2004년 9월 이전에는 活禪이라는 이름을 가졌었다)을 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한국에 돌아온 지 7년이 조금 넘은 것 같다.
사람들은 필자의 이런 생각에 동의하?? 않을 수도 있다. 순진하게 무슨 업보 같은 것을 믿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무애스님과 4년 동안 맺은 인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 지금도 마음이 간절하면 무애스님께서 꿈에 나타나 서두르지 말라고 타이르기도 하고, 이렇게 하는 게 좋다고 자상하게 사랑으로 가르쳐 주시기도 한다.
필자는 진심으로 무애스님께 감사를 드리며 살고 있다. 스님과의 만남의 인연이 없었다면 필자는 옛날의 망나니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몸살림운동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필자의 삶은 행복하다. 이것은 오로지 무애스님께서 주신 사랑의 선물이다.
이제까지는 경험주의자 무애스님으로부터 어떻게 배웠는가에 대해서 얘기해 왔다. 다음 주부터는 무엇을 배웠는가에 대해 ‘바른 자세’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부터 시작해서 몸살림 이야기의 여행을 계속해 보기로 하겠다.<계속>
김철/몸살림운동가 |
출처 : 몸살림운동 부산동호회
글쓴이 : 공구표 원글보기
메모 :
'몸살림운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김철의 `몸살림` 이야기<7> 허리를 펴고 시선은 멀리 (0) | 2008.05.17 |
---|---|
[스크랩] 김철의 `몸살림` 이야기<8> (0) | 2008.05.17 |
[스크랩] 김철의 `몸살림` 이야기<10> 올바른 자세란? (0) | 2008.05.17 |
[스크랩] 김철의 `몸살림` 이야기<11> 바르게 걷는 법 (0) | 2008.05.17 |
[스크랩] 김철의 `몸살림` 이야기<12> 바르게 걷는 법 (0) | 2008.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