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것부터 시작해서 쉬운 것으로
필자가 무애스님과 함께 기거하기 시작하면서 스님께서 6개월간 통나무로 필자의 허리와 등을 문질러서 척추를 펴 주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스님께서 다른 사람의 등을 잡아 주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치는데, 다른 사람의 척추를 잡아 주실 때에는 간단하게 양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주시는 것이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주는 것만으로 “뚝!” 하는 소리가 나면서 척추가 맞아 들어가고 펴지는 것이었다.
지금은 스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그때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스님께서는 필자를 제자로 삼고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것이다. 쉬운 방법을 먼저 배우면 어려운 방법은 배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누구나 쉬운 길을 가려고 하지, 굳이 어려운 길은 선택하려고 하지는 않는 법이다. 스님께서는 필자에게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효과가 큰 방법을 먼저 가르쳐 주시고, 다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척추를 잡는 것만이 아니었다. 스스로 손목을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실 때에도 지독하게 어려운 방법부터 가르쳐 주셨다. 그냥 아픈 쪽 손목을 엄지와 중지로 감싸 쥐고 살짝 잡아당기면서 위로 끌어 들어올렸다가 밑으로 내리면 되는 것을, 앉아서 무릎을 구부리고 오금 안에 아픈 쪽 손을 넣고 반대편 손으로 아픈 손을 잡고 잡아 빼는 방법부터 가르쳐 주셨다. 그런 연후에야 쉬운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실제로 손목이 삐었을 때 해 보면 쉬운 방법으로 자가교정이 안 될 때에도 어려운 방법을 쓰면 손목이 잘 교정이 된다.
이와 관련해서 요즘 보면 엘보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엘보는 골프를 치다가 많이 걸린다는 골프엘보와, 테니스를 치다가 많이 걸린다는 테니스엘보가 있다. 그런데 골프엘보든 테니스엘보든 원인은 손목이 삐었기 때문이다. 가정주부들도 엘보에 걸리는 일이 많은데, 이는 행주나 걸레를 짜다가 손목이 돌아가면서 삐기 때문이다. 넘어질 때 손으로 땅을 짚으면서 넘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에도 손목은 잘 삔다. 손목이 삔 상태가 오래가면 엘보 증상이 온다. 팔꿈치 쪽이 무지무지하게 아픈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병원에 가면 팔꿈치 주위의 근육을 마사지해 주기도 하고, 소염진통제나 부신피질 호르몬제를 주사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수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인은 손목이 삔 것이기 때문에, 손목을 바로잡아 주고 굳어 있는 독맥을 풀어 주면 엘보라는 병은 저절로 사라진다. 팔꿈치 쪽이 아픈 것은 손목에서 팔꿈치 쪽으로 3분의 2쯤 되는 지점에 있는 독맥(督脈: 맥 중에서도 으뜸으로 중요한 맥)이 굳어서 근육을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맥이 굳은 것은 이미 이탈돼 있는 뼈가 더 이상 이탈되는 것을 막음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하는 우리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생명체인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합리적인 장치인 것이다.
어쨌든 스님께서 필자를 가르치실 때에는 절대로 쉬운 방법부터 가르치시지 않았다. 이는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하는 나태한 인간의 내면을 간파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지금 필자도 사람들을 가르칠 때에는 절대로 쉬운 방법부터 가르치지 않는다. 예컨대 자가교정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고관절 자가교정인데, 여기에도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어려운 방법을 충분히 익힌 다음에야 쉬운 방법, 그 다음에 더 쉬운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이것 역시 지독한 경험주의자인 무애스님께서 필자에게 물려주신 것이다.
움집의 구조
필자는 지금도 스님께서 짓고 살고 계시던 움집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도 언젠가는 그런 집을 짓고 살아야지 하면서도, 또한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세상의 일인지라 꿈만 꾸고 있을 뿐이다. 좀더 시간이 지나서 한가로워지면 반드시 스님께서 사시던 집을 재현해 보고 싶다. 그 이유는 그 움집이 가장 자연과 어울리고, 때문에 인간에게 가장 좋은 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움집이라는 표현을 쓰니까 사람들은 가난해서 비좁고 지저분한 집을 짓고 살았을 것으로 추측하는 경우도 많은데, 절대로 그렇지는 않았다. 평수로 치면 5평 정도는 됐으니 스님께서 혼자 기거하시기에는 넉넉했고, 필자가 같이 끼어서 살았어도 비좁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 움집은 마을에서 30분 정도 산으로 걸어 올라가는 지점에 있었는데, 길은 오솔길 같았고 경사는 그리 심하게 지지 않았다. 집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옥처럼 남향을 했고, 뒤로는 큰 바위가 있어 벽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 바위 꼭대기는 평평해서 누워 있기에도 썩 좋았다. 스님께서는 자주 이 바위 위에 올라가 눈을 지그시 감고 수행을 하셨다. 집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 크지 않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교정을 받은 사람들은 바로 이 냇물에 가서 몸을 담그게 했다. 전통적으로 집터로서 좋다고 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이었다.
땅을 1m 50cm 정도 파고, 그 위에 물이 잘 빠지라고 돌을 깔고, 또 그 위에다 모래를 깔았다. 역시 비가 올 때 물이 들어오지 않게 하기 위해 움집 주변은 돌아가면서 도랑을 파 놓았다. 모래 위에는 쑥대를 다시 깔았는데, 그 은은한 향기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쑥대 위에는 또 강원도에서 많이 나는 갈대를 깔고, 그 위에 돗자리를 깔고 생활을 하셨다.
이렇게 돌과 모래, 쑥, 갈대를 쌓으면 돗자리를 깐 위치는 지표면에서 1m 이하 정도가 된다. 지표면에서는 차가운 냉기가 돌 때에도 1m 이하로 내려가면 따뜻하고 안온한 공기가 감돈다. 또 지표면이 여름의 뜨거운 태양열로 덥혀져 있어도 1m 이하로 내려가면 시원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 움집에는 냉방은 말할 것도 없고 특별한 난방시설도 필요가 없었다. 다만 벽난로 같은 것이 있어서 저녁 때 끼니로 감자를 구울 때 조금 불을 피우는데, 이 정도면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훈훈한 기운이 돌았다.
벽은 주변에 널려 있는 두툼한 돌로 쌓았다. 그리고 돌 사이에 있는 틈새는 옛날에 보통 시골집에서 하듯이 황토로 막아 주었다. 황토를 파다가 볏짚을 잘게 썰어 넣고 물로 반죽을 해서 한 주먹 가득 쥐고 틈새에 던지면 쏙쏙 잘도 들어간다. 그러면 황토와 볏짚에 들어 있는 좋은 미생물이 인체에 도움을 주고, 방 안과 밖의 공기가 소통을 하기 때문에 방 안의 공기가 항상 청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해 준다.
지붕은 나무로 틀을 짜고 그 위에 갈대를 얹었다. 그리고 맨 위가 되는 가운데는 지름 30cm쯤 구멍을 뚫어 놓았다. 그 구멍 위에는 송판대기를 올려놓았는데, 필요할 때면 여닫을 수 있게 해 놓았다. 열고 싶으면 긴 막대기로 밀면 됐고, 닫고 싶으면 끈을 잡아당기면 됐다. 감자를 구울 때에는 연기가 조금 나는데, 긴 막대기로 툭 치면 열려서 연기를 밖으로 배출시켰다. 밤에 누워 있으면 이 구멍 사이로 별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공기가 차갑다 싶으면 닫으면 됐다.
스님께서는 점안과 같은 의식이 있을 때에는 때로 누덕누덕 기운 승복을 입기도 하셨지만, 평상시에는 당시 보통 촌로들이 입는 옷을 입고 계셨다. 겨울에는 하얀 광목에 솜을 누빈 옷을 입으셨고, 여름에는 홑옷을 입으셨다. 깍지 않아 등 밑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머리에 풍채가 좋으신 스님의 모습은 요즘 시쳇말로 하면 정말로 ‘도사님’처럼 보였다.
언젠가 집 뒤의 바위 위에 물끄러미 앉아 계신 스님께 여쭈어 보았다.
“영감님, 외롭지 않으세요?”
상원사에서 하산하셔서 20년 이상을 이 산 속에서 혼자 사셨으니, 필자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는 외로움을 탈 법도 하다는 생각에 드린 질문이었다.
이때에도 스님의 답변은 간단했다.
“마음먹기에 달렸느니라.”
이때에는 이 말씀이 가슴에 잘 다가오지를 않았다. 누구나 하는 소리쯤으로 들렸다. 불가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惟心造)라 하여 모든 것이 마음이 짓고 까불고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당시 젊은 혈기가 방장한 필자가 이런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계속>
필자가 무애스님과 함께 기거하기 시작하면서 스님께서 6개월간 통나무로 필자의 허리와 등을 문질러서 척추를 펴 주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스님께서 다른 사람의 등을 잡아 주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치는데, 다른 사람의 척추를 잡아 주실 때에는 간단하게 양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주시는 것이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주는 것만으로 “뚝!” 하는 소리가 나면서 척추가 맞아 들어가고 펴지는 것이었다.
지금은 스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그때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스님께서는 필자를 제자로 삼고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것이다. 쉬운 방법을 먼저 배우면 어려운 방법은 배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누구나 쉬운 길을 가려고 하지, 굳이 어려운 길은 선택하려고 하지는 않는 법이다. 스님께서는 필자에게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효과가 큰 방법을 먼저 가르쳐 주시고, 다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척추를 잡는 것만이 아니었다. 스스로 손목을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실 때에도 지독하게 어려운 방법부터 가르쳐 주셨다. 그냥 아픈 쪽 손목을 엄지와 중지로 감싸 쥐고 살짝 잡아당기면서 위로 끌어 들어올렸다가 밑으로 내리면 되는 것을, 앉아서 무릎을 구부리고 오금 안에 아픈 쪽 손을 넣고 반대편 손으로 아픈 손을 잡고 잡아 빼는 방법부터 가르쳐 주셨다. 그런 연후에야 쉬운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실제로 손목이 삐었을 때 해 보면 쉬운 방법으로 자가교정이 안 될 때에도 어려운 방법을 쓰면 손목이 잘 교정이 된다.
이와 관련해서 요즘 보면 엘보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엘보는 골프를 치다가 많이 걸린다는 골프엘보와, 테니스를 치다가 많이 걸린다는 테니스엘보가 있다. 그런데 골프엘보든 테니스엘보든 원인은 손목이 삐었기 때문이다. 가정주부들도 엘보에 걸리는 일이 많은데, 이는 행주나 걸레를 짜다가 손목이 돌아가면서 삐기 때문이다. 넘어질 때 손으로 땅을 짚으면서 넘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에도 손목은 잘 삔다. 손목이 삔 상태가 오래가면 엘보 증상이 온다. 팔꿈치 쪽이 무지무지하게 아픈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병원에 가면 팔꿈치 주위의 근육을 마사지해 주기도 하고, 소염진통제나 부신피질 호르몬제를 주사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수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인은 손목이 삔 것이기 때문에, 손목을 바로잡아 주고 굳어 있는 독맥을 풀어 주면 엘보라는 병은 저절로 사라진다. 팔꿈치 쪽이 아픈 것은 손목에서 팔꿈치 쪽으로 3분의 2쯤 되는 지점에 있는 독맥(督脈: 맥 중에서도 으뜸으로 중요한 맥)이 굳어서 근육을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맥이 굳은 것은 이미 이탈돼 있는 뼈가 더 이상 이탈되는 것을 막음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하는 우리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생명체인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합리적인 장치인 것이다.
어쨌든 스님께서 필자를 가르치실 때에는 절대로 쉬운 방법부터 가르치시지 않았다. 이는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하는 나태한 인간의 내면을 간파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지금 필자도 사람들을 가르칠 때에는 절대로 쉬운 방법부터 가르치지 않는다. 예컨대 자가교정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고관절 자가교정인데, 여기에도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어려운 방법을 충분히 익힌 다음에야 쉬운 방법, 그 다음에 더 쉬운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이것 역시 지독한 경험주의자인 무애스님께서 필자에게 물려주신 것이다.
움집의 구조
필자는 지금도 스님께서 짓고 살고 계시던 움집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도 언젠가는 그런 집을 짓고 살아야지 하면서도, 또한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세상의 일인지라 꿈만 꾸고 있을 뿐이다. 좀더 시간이 지나서 한가로워지면 반드시 스님께서 사시던 집을 재현해 보고 싶다. 그 이유는 그 움집이 가장 자연과 어울리고, 때문에 인간에게 가장 좋은 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움집이라는 표현을 쓰니까 사람들은 가난해서 비좁고 지저분한 집을 짓고 살았을 것으로 추측하는 경우도 많은데, 절대로 그렇지는 않았다. 평수로 치면 5평 정도는 됐으니 스님께서 혼자 기거하시기에는 넉넉했고, 필자가 같이 끼어서 살았어도 비좁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 움집은 마을에서 30분 정도 산으로 걸어 올라가는 지점에 있었는데, 길은 오솔길 같았고 경사는 그리 심하게 지지 않았다. 집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옥처럼 남향을 했고, 뒤로는 큰 바위가 있어 벽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 바위 꼭대기는 평평해서 누워 있기에도 썩 좋았다. 스님께서는 자주 이 바위 위에 올라가 눈을 지그시 감고 수행을 하셨다. 집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 크지 않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교정을 받은 사람들은 바로 이 냇물에 가서 몸을 담그게 했다. 전통적으로 집터로서 좋다고 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이었다.
땅을 1m 50cm 정도 파고, 그 위에 물이 잘 빠지라고 돌을 깔고, 또 그 위에다 모래를 깔았다. 역시 비가 올 때 물이 들어오지 않게 하기 위해 움집 주변은 돌아가면서 도랑을 파 놓았다. 모래 위에는 쑥대를 다시 깔았는데, 그 은은한 향기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쑥대 위에는 또 강원도에서 많이 나는 갈대를 깔고, 그 위에 돗자리를 깔고 생활을 하셨다.
이렇게 돌과 모래, 쑥, 갈대를 쌓으면 돗자리를 깐 위치는 지표면에서 1m 이하 정도가 된다. 지표면에서는 차가운 냉기가 돌 때에도 1m 이하로 내려가면 따뜻하고 안온한 공기가 감돈다. 또 지표면이 여름의 뜨거운 태양열로 덥혀져 있어도 1m 이하로 내려가면 시원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 움집에는 냉방은 말할 것도 없고 특별한 난방시설도 필요가 없었다. 다만 벽난로 같은 것이 있어서 저녁 때 끼니로 감자를 구울 때 조금 불을 피우는데, 이 정도면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훈훈한 기운이 돌았다.
벽은 주변에 널려 있는 두툼한 돌로 쌓았다. 그리고 돌 사이에 있는 틈새는 옛날에 보통 시골집에서 하듯이 황토로 막아 주었다. 황토를 파다가 볏짚을 잘게 썰어 넣고 물로 반죽을 해서 한 주먹 가득 쥐고 틈새에 던지면 쏙쏙 잘도 들어간다. 그러면 황토와 볏짚에 들어 있는 좋은 미생물이 인체에 도움을 주고, 방 안과 밖의 공기가 소통을 하기 때문에 방 안의 공기가 항상 청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해 준다.
지붕은 나무로 틀을 짜고 그 위에 갈대를 얹었다. 그리고 맨 위가 되는 가운데는 지름 30cm쯤 구멍을 뚫어 놓았다. 그 구멍 위에는 송판대기를 올려놓았는데, 필요할 때면 여닫을 수 있게 해 놓았다. 열고 싶으면 긴 막대기로 밀면 됐고, 닫고 싶으면 끈을 잡아당기면 됐다. 감자를 구울 때에는 연기가 조금 나는데, 긴 막대기로 툭 치면 열려서 연기를 밖으로 배출시켰다. 밤에 누워 있으면 이 구멍 사이로 별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공기가 차갑다 싶으면 닫으면 됐다.
스님께서는 점안과 같은 의식이 있을 때에는 때로 누덕누덕 기운 승복을 입기도 하셨지만, 평상시에는 당시 보통 촌로들이 입는 옷을 입고 계셨다. 겨울에는 하얀 광목에 솜을 누빈 옷을 입으셨고, 여름에는 홑옷을 입으셨다. 깍지 않아 등 밑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머리에 풍채가 좋으신 스님의 모습은 요즘 시쳇말로 하면 정말로 ‘도사님’처럼 보였다.
언젠가 집 뒤의 바위 위에 물끄러미 앉아 계신 스님께 여쭈어 보았다.
“영감님, 외롭지 않으세요?”
상원사에서 하산하셔서 20년 이상을 이 산 속에서 혼자 사셨으니, 필자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는 외로움을 탈 법도 하다는 생각에 드린 질문이었다.
이때에도 스님의 답변은 간단했다.
“마음먹기에 달렸느니라.”
이때에는 이 말씀이 가슴에 잘 다가오지를 않았다. 누구나 하는 소리쯤으로 들렸다. 불가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惟心造)라 하여 모든 것이 마음이 짓고 까불고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당시 젊은 혈기가 방장한 필자가 이런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계속>
김철/몸살림운동가 |
출처 : 몸살림운동 부산동호회
글쓴이 : 공구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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