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지 않는 가수, 김민기
김민기는 나와 동시대인이다.그와 나는 한편으로는 야만의 연대였고,또 한편으로는 불의의 연대였던 유신시대를 함께 통과해 온 동시대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잘 모른다.그의 이름은 너무나 오랫동안 금지된 이름이었고,유언비어 속에나 나도는 이름이었다.
그의 실재는 가려져 있었고, 그는 왜곡과 과장,신비화로 감싸여져 통기타 세대사이에 신화적 존재였다.70년대 중반의 어느날 나는 어느 카페에서 그의 낮고 침울한 목소리에 실린 「친구」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다.자정 넘은 시간 카페의 셔터는 내려져 있었고 분위기는 비밀결사 집회처럼 엄숙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그 깊은 바다속에 고요히 잠기면/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사람들은 낮고 비장한 어조로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노래의 침울성에 나는 불에 덴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러나 나는 그 노래가 매우 생소했고,함께 부를 수가 없었다.
김민기는 누구인가.그는 시집없는 시인이요,그림없는 화가요,노래하지 않는 가수다.그는 국민적인 애창곡 「아침이슬」의 작사작곡자요,공연기획자요,현실변혁 운동가이다.그는 그 모든 것이며,동시에 그는 아무 것도 아니다.평범한 화가지망생이었던 그가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그는 역사의 중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고,그의 개인사에는 우리 역사의 비바람치는 격동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각인되었다.
김민기는 1951년 3월31일 한국전쟁의 끝무렵 전북 이리에서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그가 태어날 때 이미 그의 부친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의사였던 그의 부친은 패퇴해 북으로 퇴각해 가던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어 그는 유복자로 태어난 것이다.그의 모친은 함경도 원산 태생으로 연희전문 4학년 때 시위주동자로 찍혀 제적당한 사람이다.그녀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 자격을 따서 산파로 일하다가 이리의 한 병원에서 김민기의 부친과 만나 10남매를 두었던 것이다.
김민기의 유년기를 지배한 정서는 외로움과 공포였다.손 위의 형들과 누나들이 직장이며 학교로 가버리고 나면 혼자 텅 빈 집을 지켜야만 했던 어린 그는 막대기로 마당에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혼자 하루종일 외로움 속에 방목되었던 그는 외로움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유년기 정서를 결정지은 것들은 방공훈련 사이렌 소리,등화관제의 어둠,어둠을 흔들던 개 짖는 소리,저 혼자 울리는 커다란 괘종시계 소리,홈통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 따위였다.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4학년 때의 모습
김민기는 1969년 경기중,경기고를 거쳐 서울대 미대에 진학했다.중고교시절 내내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렸던 그는 미대에 진학하자마자 더욱 그림에 몰입했다.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그림물감값을 조달하던 그에게 고교시절 친구가 찾아와 노래를 함께 하자는 제안을 했다.고교시절에 이미 소문난 기타연주자였던 그는 그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방에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그러다 보니 제대로 학점을 이수하지 못해 낙제를 했다.
그 무렵 어느날 고교 동창생인 임문일이 서강대에 다닌다는 한 앳된 단발머리 여학생을 그에게 소개했다.김민기와 양희은의 역사적인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그때부터 김민기는 집안사정으로 노래를 불러 돈을 벌어야 했던 양희은의 노래 반주를 맡았고,그녀를 위해 본격적인 작곡을 했다.양희은의 가수 데뷔곡인 「아침이슬」도 그때 태어난 노래 중의 하나였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황야에/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이 노래는 발표 당시 '한국가요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여놓은 곡'이라는 평가를 받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아침이슬」은 1975년 공윤에 의해 금지곡이 되어 방송을 통해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다른 금지곡들은 분명한 금지사유가 명시되었지만 「아침이슬」에는 아무런 금지사유가 명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금지될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금지된 노래.정부의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이 노래만큼 널리 불려지고 사랑받은 노래도 없다.수만의 군중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아침이슬」은 무서운 감동과 전율을 동반하는 장엄한 레퀴엠같았다.
1971년은 김민기에게 의미심장한 해였다.그해 김민기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독집음반을 출반했고 반체제 저항시인인 김지하를 만났다.레코드 출반은 통기타 가수들의 성지였던 YMCA 청개구리홀의 후원자인 경음악평론가 최경식씨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레코드는 발매된지 얼마 되지 않아 압수조치를 당했다.1972년 봄 서울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에서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됐고 시중에 유통 중이던 그의 레코드는 전량 수거 압수되었던 것이다.김민기의 이름으로 출반된 이 독집음반은 지금은 매니아들 사이에 수십만원에 거래되는 희귀본이다.
김지하와의 만남은 폰트라(PONTRA : Poem on Trash 「잿더미 위에 시를」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시인,학자,화가,음악인 ,영화인들의 모임으로 이어졌다.이 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 김민기는 자생적 서정을 노래로 표현하던 고립분산된 개인,소시민적 자유주의자에서 시대의식을 온몸으로 구현하는 의식화된 개체로 새롭게 탄생한다.그 이후 그는 서울의 빈민촌에서 야학을 열고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에도 참가하고,가톨릭문화운동,국악대중화운동,마당극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1972년 여름 김민기는 마산수출공단의 노동자들과 해변으로 야유회를 갔다.석양무렵 고깃배들이 하나씩 둘씩 항구로 귀선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그는 무심코 "야,참 멋있는데"라고 감탄을 터뜨렸다.
그때 옆에 있던 여공 하나가 "저 사람들은 모두 먹고 살자고 목숨을 바다에 맡겨놓고 하는 일인데,뭐가 멋있다는 거예요?"라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그 순간 그는 가슴이 얼어붙는 듯 했다.그는 고개를 떨구고 속으로 "난,아직 멀었구나"하고 생각했다.자신의 내면 속에 남아 있는 역사나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의 잔재,몰역사적인 소지식인의 몽롱한 감수성에 대해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한 음악평론가는 "70년대는 김민기의 「아침이슬」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했다.하지만 정작 김민기 자신에겐 암울한 시기였다.그의 이름이 붙은 노래,공식적인 활동은 거의 모두 금지되던 시기였다 .
1975년 최전방에서의 혹독한 군대생활을 마치고 제대했을 때 그의 노래들은 모두 방송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그러나 그의 이름은 더욱 유명해져 있었다.그는 부평 부근의 공장에 취업했다.그는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교대」「야근」「음모」와 같은 노래들을 만들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돌보는 사람도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라는 노래는 그의 운명을 암시한다.그는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70 년대를 통과해 나왔다.
1978년 군대시절 작곡한 「늙은 군인의 노래」「식구생각」등과 그 이후 「밤배놀이」「상록수」등으로 음반제작을 시도한다.노래는 양희은이 부르고 곡은 그가 썼으나 그의 이름으로는 공윤의 심의를 통과할 수 없었으므로 남의 이름을 빌려 썼다.그러나 그렇게 낸 음반마저 얼마 안가 일부 삭제,다시 판금되었다.그는 좌절했다.
그는 몇차례 공연과 관련하여 기관에 연행,조사,석방 등을 되풀이하다가 전북 익산으로 낙향하여 어느 집에서 머슴살이를 한다.그를 고용했던 주인집은 정기적으로 경찰에 그의 동태를 보고해야만 했다.
80년대 초반 해태양식장과 탄광노동으로 번 돈을 영농자금 삼아 그는 김제와 전곡에서 농사를 지었다.쌀농사를 짓고,마을청년들로 청년회를 조직해 쌀 출하사업도 벌였다.1983년 겨울 전곡의 집에 화재가 나 가재도구와 책들이 몽땅 소실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시골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김석만, 오종우 등과 함께 사무실을 낸다.아동용 뮤지컬 공연을 준비하고 음반출반을 기획했지만 내용과 상관없이 김민기라는 「불온한 이름」때문에 공윤심의를 위한 접수조차 거부되었다.또 다시 좌절이었다.
1985년 8월 31일,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그의 결혼식이 열렸다 .김민기는 이미 서른다섯의 노총각이었다.그의 결혼식이 열렸던 서울미술관에는 수많은 하객들이 모여 그의 결혼을 축하하였다.결혼 이후 그는 70년대의 「신화적 인물」이라는 배역을 거부하고 조용한 「생활인」으로 돌아갔다.
글: 시인, 문학평론가 장석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