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우리 음악

유재하 1집 - 사랑하기 때문에 외 전곡

로만짜 2012. 9. 3. 00:00
LONG %EA%B8%80%EC%9D%98%20%EB%82%98%EB%A8%B8%EC%A7%80%20%EB%B6%80%EB%B6%84%EC%9D%84%20%EC%93%B0%EC%8B%9C%EB%A9%B4%20%EB%90%A9%EB%8B%88%EB%8B%A4. ARTICLE

 

유재하 1집 사랑하기 때문에 1987
1집 - 사랑하기 때문에 (서울음반,1987)
유재하 1962-1987
유재하 1집 - 전곡 연주
 
아티스트 : 유재하
음반 이름 : 사랑하기 때문에
음반 구분 : 정규, studio - 1집
발매 일자 : 1987 / 한국 (Rep. of Korea) 1987 서울음반 (SPDR-070)
 Side A
 1. 우리들의 사랑
(작사:유재하 작곡:유재하 편곡:유재하)
 2. 그대 내 품에 (작사:유재하 작곡:유재하 편곡:유재하)
 3. 텅빈 오늘밤 (작사:유재하 작곡:유재하 편곡:유재하)
 4.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작사:유재하 작곡:유재하 편곡:유재하)
 5. MINUET (경음악) (작곡:유재하 편곡:유재하)
 Side B
 1. 가리워진 길
(작사:유재하 작곡:유재하 편곡:유재하)
 2. 지난날 (작사:유재하 작곡:유재하 편곡:유재하)
 3. 우울한 편지 (작사:유재하 작곡:유재하 편곡:유재하)
 4. 사랑하기 때문에 (작사:유재하 작곡:유재하 편곡:유재하)
 5. 정화의 노래 (건전가요)
Credits 
레코딩 스튜디오 :  서울 스튜디오
작사, 작곡, 편곡 : 유재하
사진 : 이정훈
녹음 : 최세영 (1986. 12 ~ 1987. 3. 서울 스튜디오)
* 친구들
Violin : 김은영, 박상은, 손미애, 송찬주, 우혜경, 유현아, 이영희, 조원경, 조원정, 최은미
Viola :권진영, 박혜정, 정성희
Cello : 김신범, 김진연
저의 음악이 완성되는 끝까지 관심있게 지켜봐 주신 서울 스튜디오 최세영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바쁘신 와중에도 음악적으로 인간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조원익 형님께도 감사의 마음 전할 길이 �으며, 아을러 반주를 도와주신 김애란씨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께도 감사드립니다.
Introduction 
모짜르트와 베토벤을 좋아하고 일생동안 음악에의 부푼 꿈을 가졌던 유재하는, 1962년 6월 6일 사업을 하시는 고 류일청씨와 어머니 황영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열정이 누구보다도 뜨겁고 적극적이었으며, 일정한 틀에 얽메이지 않는 자유스럽고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 음악적 재능 또한 뛰어나서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여러 악기를 다룰 줄 알았고, 작곡과 작사 편곡에 이르기 까지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었다.
한양대 작곡과 4학년 재학 시절,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의 키보드 주자가 되어 처음 가요계에 들어서면서부터 자신의 독집 앨범을 낼 때까지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접속한 발라드 풍의 노래들을 작곡하였는데, 그 음악적 독창성 또한 뛰어났다. 그러나 87년 8월에 발표된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유작이 된 '사랑하기 때문에' 앨범은 발표된 당시보다 사후에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유재하는 조동진, 김민기, 이문세, 김현식, 김광민, 한영애 등과도 깊은 우정과 폭넓은 음악 세계에 접할 수 있었으나 그 역량을 다 펴지도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둔채 1987년 11월 1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훌쩍 세상을 떠나갔다.....
Introduction  2
1962년에 태어난 유재하는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여왔다. 그는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 첼로 등 거의 모든 악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주위의 부러움을 사곤했는데 대학 시절(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는 국내 최고의 밴드인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연주자로 활동하며 그 역량을 널리 인정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문세, 조동진, 김현식, 김수철 등 내로라 하는 국내 음악인들과 음악적 교류를 나누었으며 1987년 여름에는 드디어 자신의 첫번째 솔로 앨범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날>, <사랑하기 때문에>가 서서히 인기를 얻어갈 무렵인 그해 11월 1일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하고 만다.
못다 이룬 그의 음악과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기념하기 위해 매 해마다 '유재하 가요제'가 열리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재능 있고 실력 있는 아티스트들이 대거 배출되어 가요계를 살찌우고 있다. 본작은 앞서 언급했듯이 유재하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발표한 단 하나의 앨범이다. 때문에 이 앨범을 접하면 먼저 아쉬움이 밀려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홈페이지 : http://www.yjh.or.kr
출생 : 1962년 06월 06일 / 한국
사망 : 1987년 11월 01일 (교통사고로 사망)
데뷰 (Debut) : 1983년 (조용필과 위대한탄생에서 활동)
학력
- 1969년 은석초등학교 입학
- 1975년 삼선 중학교 입학
- 1978년 대일 고등학교 입학
- 1981년 한양대학교 작곡과 입학
프로필
●1983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활동
●1986년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활동
●1987년 8월 "사랑하기 때문에" 독집 앨범 발표
     
음반 한장으로 ‘고품격 발라드’ 확립한 천재 - 유재하
» 데뷔작이자 유작이 된 가수 유재하의 유일한 앨범
천재라는 말은 매혹적이다. ‘요절한 천재’라는 단어는 얼마나 낭만적이고 극적인가.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과잉일 정도로 신화화의 대상이 되곤 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던가. 대중음악계에 이런 사례를 들라면 유재하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유재하의 음악 경력은 너무 짧다. 음대 작곡과 재학 시절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졸업 뒤에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을 거쳤다고는 하지만 아주 잠깐 동안 활동했을 뿐이다. 조용필 7집에 수록된 〈사랑하기 때문에〉, 김현식이 부른 〈가리워진 길〉과 〈그대 내 품에〉, 이문세가 부른 〈그대와 영원히〉 등 다른 가수의 목소리를 탄 곡도 그리 많지는 않다.
하지만 데뷔작이자 유작이 된 1987년 앨범이 고급 발라드의 지평을 확대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사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료, 후배 음악인들의 헌사와 추앙이 계속되는 걸 보면 그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계의 모차르트”, “음반 한 장으로 전설이 되었다”라는 식의 표현이 과장일지언정 1997년 추모 앨범을 통해 많은 음악인들이 그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을 표시했고, 유재하가요제라는 경연대회를 통해 후배 뮤지션들이 대중음악계에 등용되어 일군의 계보를 형성하지 않았던가.
베이시스트이자 및 서울음반의 ‘문예부장’이던 조원익이 프로듀싱한 이 앨범에서 유재하는 기타, 피아노 등 여러 악기를 능숙히 연주하며 작사·작곡·편곡·노래까지 겸하는 팔방미인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의 곡은 대개 피아노를 중심으로 관악기나 현악기가 간결하면서도 우아하게 수식하는데, 가령 〈가리워진 길〉은 오보에, 클라리넷, 플루트가 고즈넉하게 협연하고, 〈사랑하기 때문에〉는 실내악 무드의 현악 앙상블을 들려준다. 클래식적 토양(특히 고전주의 스타일)은 〈미뉴엣〉 같은 클래식 소품 연주곡에서도 공공연히 드러나지만, 절제되고 간소한 곡 형식,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는 단아하고 깔끔한 사운드에서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재즈풍의 즉흥적 피아노 솔로(〈우울한 편지〉)나 기타 솔로(〈사랑하기 때문에〉)를 펼치기도 했고, 이문세가 백업보컬로 참여한 〈지난 날〉, 뉴웨이브·신스팝 스타일의 〈텅빈 오늘밤〉처럼 빠른 템포의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클래식 음악에 뿌리를 두고 퓨전 재즈에서 자양분을 흡수해 고품격 발라드의 공식을 확립했다. 그의 가사도 빼놓을 수 없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화두로 ‘사랑하기 때문에’ 울고 웃고 ‘우울한 편지’를 띄우며 그에게 길이 되어 달라고 호소하지만 애상적이면서도 담담한 어조를 잃지 않는다.
그런데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1987년의 소용돌이치던 시대적 분위기와는 너무도 다른,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노래한 연가를, 다른 식의 은유로 수렴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우울한 편지’가 우아하게 라디오 전파를 타던 장면처럼….
인터넷 한겨레 : 최지선/대중음악 평론 2007-04-15
     
유재하, 한국 ‘대중음악의 自主’ 를 이루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인 1987년 여름, 이 앨범이 발표되었을 때 음악계 종사자들은 일대 경이의 시선을 보낸다. 앨범의 주인이 작사·작곡뿐 아니라 ‘편곡’까지 혼자 해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여기엔 훗날 ‘발라드의 제왕’이 될 신승훈도 끼어 있었다. “아, 모든 작업을 혼자서 다하다니….” 
멜로디와 가사를 쓰는 것을 넘어 그 평면적인 악보를 우리가 듣는 완성된 곡으로 만드는 작업인 편곡은 모든 과정이 분업화되어 있던 당시 관습으로는 뮤지션들에게 넘지 못할 벽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꿈과도 같은 것이었다. 유재하의 이 앨범은 국내 대중음악 사상 처음으로 음악가가 꿈꾸는 음악적 자주(自主)의 완전 실현을 일궈낸 기념비적 성과물이다.
음악가의 상상력을 앨범이라는 실체로 온전히 꾸려내는 작업은 아무나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양대 음대 작곡과를 전공, 클래식의 화성학을 터득하고 갖가지 악기들의 음색을 관할할 수 있는 유재하의 비범한 재능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에 이미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만이 속하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활약했다. 이런 인연으로 조용필은 유재하가 쓴 ‘사랑하기 때문에’를 취입하게 된다.
그는 피아노는 말할 것도 없고, 바이올린·첼로·기타 등 대다수의 악기를 마스터한 멀티 플레이어였다. 앨범 중간에 연주곡으로 수록한 ‘미뉴에트’ 한 곡만으로 그의 독자적 음악영토와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들의 사랑’ ‘그대 내 품에’ ‘가리워진 길’ ‘지난 날’ 등 수록곡 전반에 다양하고 까다로운 화성이 구사되고 곳곳에 지금도 놀랄 음악적 장치와 아이디어들이 숨어 있다. 마치 보물찾기의 유혹을 자극한다.
음악은 모든 게 달랐다. 멜로디는 재래식 방식과 완전히 유리되었고, 가요의 히트 기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통속성과도 작별했다. 처음 듣는 선율 패턴을 전하는 유재하의 노래도 생경할 수밖에 없었다. 음악 관계자들마저도 “가수의 노래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곡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것이 국내 대중음악의 새로운 시작이자 도약이라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는 이를 “한국의 대중음악은 유재하 이전과 유재하 이후로 나뉜다”고 표현했다.
 
유재하 1집 음반 ‘사랑하기 때문에’ 
유재하가 음악계에 남긴 자취는 1989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열려 유희열, 조규찬, 심현보 등 영향을 받은 음악 인재들이 속출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자연스럽게 ‘유재하 사단’이라는 수식도 등장했다. 상기한 인물들은 물론 유영석, 한동준, 김광진, 김동률 등 많은 후배 음악가들이 그의 음악을 숭배했다. 아마도 역사적으로 우리 음악가의 이름 뒤에 사단이란 거창한 말이 붙은 사람은 신중현과 유재하밖에 없을 것이다.
유재하와 함께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멜로디와 모양새의 대중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앨범이 나온 지 3개월이 채 안된 1987년 11월1일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그의 불우를 대가로 우리는 과분한 영광을 얻은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에게도 역사의 보상이 축적되었다. 아니, 사망한 날짜에 벌써 그는 대중음악의 전설로 비상했다. 유재하와의 관계를 숙명으로 여겼다는 신승훈은 정확히 3년 뒤인 1990년 11월1일에 데뷔한다.
〈임진모|음악평론가 www.izm.co.kr
유재하는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양대 작곡과에서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았다. 당시 언더그라운드 진영에는 유재하처럼 이론과 실기를 두루 겸비한 뮤지션이 흔치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재능은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 첼로 등의 악기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던 그는 대학 시절 당대 최고의 밴드라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로 처음 모습을 드러내며 각광을 받았고, 이후 김현식의 백밴드인 봄여름가을겨울 활동을 거쳐 자신의 솔로 앨범 작업을 하게 된다. 솔로 앨범을 제작하는 동안에도 그는 많은 뮤지션들에게 곡을 제공했는데 그 노래들은 지금까지도 불리고 있는 조용필의 ‘사랑하기 때문에’, 김현식의 ‘가리워진 길’, 이문세의 ‘그대와 영원히’ 같은 노래들이다. 정규 음악교육을 거치며 자연스레 체득하게 된, 클래식의 화성을 이용한 그의 작곡법은 이후 그의 음악을 규정짓는 상징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런 특성은 자신의 독집 앨범에서 극대화된다. 앨범 안에서 그는 모든 곡의 작사·작곡·편곡을 혼자 해냈으며 거의 모든 악기들의 세션까지도 혼자 담당했다. 클래식과 재즈에 기반한 감성적이며 투명한 음악은 그의 요절과 맞물리며 어떤 하나의 현상으로까지 이어졌다. (그가 사망한 날은 1987년 11월1일이었고, 정확히 3년 후 김현식도 같은 날짜에 세상을 뜬다.)
그의 단 한 장의 앨범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그의 음악을 듣고 자란 뮤지션들이 1990년대와 200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를 이끌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트리뷰트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의 사망 후 만들어진 유재하음악경연대회를 통해 배출된 뮤지션들을 빼고는 한국대중음악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김학선|웹진 가슴 편집인〉 : 인터넷 경향신문 2007년 08월 23일
     
유재하 - 사랑하기 때문에 (서울음반,1987)
유재하 1집 - 사랑하기 때문에 : 우리들의 사랑 / 가리워진 길 (1987)
서울음반 (SPDR-070) | 1987-08
※ 가슴네트워크, 경향신문 공동기획
‘가슴네트워크 선정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2위
(가슴에서는 매주 월요일/목요일, 경향신문에서는 매주 목요일 1~100위 음반리뷰를 순차적으로 올립니다. 총50주 동안 연재할 예정이고, 32명의 필자가 참여합니다.
*별점은 해당 필자의 의견이 아니라 가슴에서 일률적으로 매긴 평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인 1987년 여름, 이 앨범이 발표되었을 때 음악계 종사자들은 일대 경이의 시선을 보낸다. 앨범의 주인이 작사 작곡을 다했다는 점보다는 그 옆의 ‘편곡’까지 혼자 전부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거기에는 나중 발라드의 제왕이 될 신승훈도 끼어 있었다. “아, 모든 작업을 혼자서 다하다니...”
멜로디와 가사를 쓰는 것을 넘어 그 평면적인 악보를 우리가 듣는 완성된 곡으로 만드는 작업인 편곡은 모든 과정이 분업화되어있던 당시 관습으로는 뮤지션들에게 넘지 못할 벽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꿈과도 같은 것이었다. 유재하의 이 앨범은 국내 대중음악 사상 처음으로 음악가가 꿈꾸는 음악적 자주(自主)의 완전 실현을 일궈낸 기념비적 성과물이다.
음악가의 상상력을 앨범이라는 실체로 온전히 꾸려내는 작업은 아무나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양대 음대 작곡과를 전공, 클래식의 화성학을 터득하고 갖가지 악기들의 음색을 관할할 수 있는 유재하의 비범한 재능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는 대학 재학시절에 이미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만이 속하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활약했다. 이런 인연으로 조용필은 유재하가 쓴 <사랑하기 때문에>를 취입하게 된다.
그는 피아노는 말할 것도 없고, 바이올린 첼로 기타 등 대다수의 악기를 마스터한 멀티 플레이어였다. 앨범 중간에 연주곡으로 수록한 <미뉴에트> 한 곡만으로 그의 독자적 음악영토와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들의 사랑><그대 내 품에><가리워진 길><지난 날> 등 수록곡 전반에 다양하고 까다로운 화성이 구사되고 곳곳에 지금도 놀랄 음악적 장치와 아이디어들이 숨어 있다. 마치 보물찾기의 유혹을 자극한다.
음악은 모든 게 달랐다. 멜로디는 재래식 방식과 완전히 유리되었고, 가요의 히트기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통속성과도 작별했다. 처음 듣는 선율패턴을 전하는 유재하의 노래도 생경할 수밖에 없었다. 음악관계자들마저도 “가수의 노래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곡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것이 국내 대중음악의 새로운 시작이자 도약이라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는 이를 “한국의 대중음악은 유재하 이전과 유재하 이후로 나뉜다.”고 표현했다.
유재하가 음악계에 남긴 자취는 1989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열려 유희열, 조규찬, 심현보 등 영향을 받은 음악인재들이 속출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자연스럽게 ‘유재하사단’이라는 수식도 등장했다. 상기한 인물들은 물론, 유영석, 한동준, 김광진, 김동율 등 많은 후배 음악가들이 그의 음악을 숭배했다. 아마도 역사적으로 우리 음악가의 이름 뒤에 사단이란 거창한 말이 붙은 사람은 신중현과 유재하 밖에 없을 것이다.
유재하와 함께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멜로디와 모양새의 대중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앨범이 나온 지 3개월이 채 안된 1987년 11월1일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그의 불우를 대가로 우리는 과분한 영광을 얻은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에게도 역사의 보상이 축적되었다. 아니, 사망한 날짜에 벌써 그는 대중음악의 전설로 비상했다. 유재하와의 관계를 숙명으로 여겼다는 신승훈은 정확히 3년 뒤인 1990년 11월1일에 데뷔한다. (임진모/음악평론가 www.izm.co.kr)
※ 가슴네트워크, 경향신문 공동기획 ‘가슴네트워크 선정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2위 (가슴에서는 매주 월요일/목요일, 경향신문에서는 매주 목요일 1~100위 음반리뷰를 순차적으로 올립니다. 총50주...
☆☆☆☆☆ | 1987, GMA121800, ㅇ, 가슴네트워크, 서울음반, 유재하
     

 

출   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 카페 / 촬리 / 2008.04.21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