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chaikowsky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NO,1 in B minor op.23
Martha Argerich, piano
Charles Dutoit, cond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LP 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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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악장이어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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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llegro nontroppo e molto maestoso - Allegro con spir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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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ndintino simplice - Ptestissi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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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llegro con fuoco
차이콥스키는 34세때, 모스크바에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직을 맡고 있으면서 약 1개월에 걸쳐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그 당시 그는 이미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 상당히 알려지고 있었지만, 이곡의 완성에는 몹시 애를 먹었던 모양으로 아우에게 보낸 편지에 "이 곡은 좀처럼 진전이 없으며 나로서는 도저히 완성시키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머리를 싸매고 곡을 생각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 파아노 협주곡을 완성시킨 차이콥스키는 음악원의 초대 교장인 니콜라이 루빈시타인(Nikolay Rubinstein)-피아노의 거장이며 유명한 안톤 루빈시타인의 아우이고 과동료 교수인 후베르트(Nikolay Hubert)를 자기 연구실로 초청하여 시험 연주하여 들려주었다. 그리고 모스크바 악단의 거두인 두 사람의 호의에 찬 비평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뜻밖에 그 두사람은 연주 후에도 아무말없이 침묵만 지키고 있고 그가 의견을 구하자 루빈시타인은 격렬한 어조로 이곡은 피아노에 부적당하다느니 졸렬하다느니 개성이 없다는 등의 혹평을 하였다. 차이콥스키가 분격한나머지 거기서 뛰쳐나가 다른 방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에 루빈시타인이 뒤따라 와서 이협주곡이 연주에 적당치 못함을 재삼 설명하고 다시 재작할 경우 연주회에서 자기가 초연을 맡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이 곡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결정을 거부하고 초연을 맡아 줄 피아니스트를 물색하여 드디어 독일에서 그의 작품을 휼륭해 연주해 준 바 있는 [한스 폰 뮐러]에게 악보를 보내어 좋은 기회에 초연을 밑아주기를 부탁하였다. 뮐러는 곧 이 곡이 매우 독창적이며 경탄한 명곡이란 내용의 서함을 차이콥스키에게 보내오고 미국연주여행 때 1875년 10월 22225일 보스턴에서 초연을 하였으며 그 결과 많은 박수 갈채를 받앗다.
이와같이 되어 이 협주곡은 애초에 [니콜라이 루비시타인]에게 헌정될 예정이었으나 [한스 폰 뮐러]에게 헌정되었고 모스크바에서 초연은 그해 11월에 이루어 졌는데 여기서도 크게 호평을 받았다. [루빈시타인]은 이곡이 초연된 3년후에 차이콥스키에게 사과하였으며 그 이후 자신의 연주회에서 이 곡을 즐겨 채택하였기 때문에 두사람의 우정은 원상으로 되돌아 갔다.
루빈시타인이 처음에 들었을 때에 그처럼 폭언을 한 것은 차이콥스키가 이곡을 작곡함에 있어서 선배이며 피아노의 대가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자기에게 가르침을 받지 안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지며 후에 이 협주곡이 각국의 피아니스트들에게 앞을 다투어 채택되었으므로 차이콥스키에게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엇다고 한다.
또한 차이콥스키는 1889년에 이곡을 다시 손질하여 지금의 것으로 만들어 그의 세곡의피아노 협주곡 중에 가장 빈번히 연주되는 곡이 되었다. 이 피아노 협주곡 제 1번은 세련된 서구적인 취미의 화려함은 없지만 약간 러시아적인 주제를 사용한 슬라브적인 중후한 선의 굵기와 음색적인 관현악법이 이 곡의 매력이 되어있다.
Martha Argerich 마르타 아르헤리치 (아르헨티나 1941.6.5 ~ )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부친이 외교관이고 194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아르헨티나의 피아니스트이다. 현대 활동중인 중견 피아니스트중에서도 그 활동의 폭과 연주의 완성도 면에서 최고를 보여주는 피아니스트가 59살인 마르타 아르헤리치이다. 그녀는 여류 피아니스트로서는 드물게도 다이내믹과 기교를 완벽히 갖춘 연주자로 평가되고 있다. 열정적인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1941년 6월 5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처음 빈센초 스카라무차로부터 피아노 수업을 받기 시작하여, 8살 때 콜론느 극장에서 모짜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과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1번으로 데뷔했다.
1955년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유럽으로 이주한 후, 니키타 마갈로프, 리파티 부인, 프리드리히 굴다, 베네디티 미켈란젤리, 스테판 아쉬케나제 등으로부터 피아노 수업을 받았다. 특히 프리드리히 굴다는 엄격한 스승으로서 그녀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슈만의 '아베크 변주곡'과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를 불과 5일만에 독파하도록 요구할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이 과업을 쉽게 해냈다.
1957년 아르헤리치는 불과 3주 동안에 볼자노의 부조니 콩쿨과 제네바의 국제 피아노 콩쿨에서 우승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60년부터 레코딩 작업을 시작하는데, 도이취 그라마폰에서 쇼팽, 리스트, 브람스, 라벨, 프로코피에프의 작품을 수록한 앨범을 레코딩하여 한바탕 '아르헤리치 열풍'을 일으켰다.특히 그녀가 연주한 프로코피에프의 '토카타'와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 6번'을 듣고 호로비츠는 두 눈을 깜박거리며 감격스러워 했다. 그러나 1년에 150회 이상의 콘서트와 레코딩 작업으로 잠시 주춤거리기도 했다.
아르헤리치는 1965년 바르샤바의 쇼팽 국제 콩쿨에서 우승과 마주르카 특별상을 획득하면서 다시 등장하여,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되었다. 당시 심사위원으로 배석했던 위젠 리스트는 그녀의 연주에 대해서 '화산처럼 강렬한 열정의 분출'이라고 극찬했다. 1967년 뉴욕, 링컨센터의 연주를 통해 미국에서 데뷔하고, 1968년 지휘자, 샤를르 뒤트와와 결혼했다. 1970년 샤를로 뒤트와 지휘, 마르타 아르헤리치 피아노 연주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을 녹음하여 단번에 베스트셀링 레코드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후에 그녀는 뒤트와와 이혼했다.
아르헤리치의 레파토리는 베토벤, 쇼팽, 슈만, 리스트, 드뷔시, 프로코피에프, 라벨, 바르톡 등을 포괄하지만, 그녀는 주로 19, 20세기의 비르투오조 피아노 작품 연주를 통해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는 좀처럼 그녀 혼자서 연주하는 경우를 만나기가 어렵다. 아르헤리치는 1978년 워싱턴 DC에서 바르톡의 소나타와 아르헨티나의 현대 작곡가 히나스테라의 '아르헨티나 무곡' 세 작품을 공연한 이후 솔로 리사이틀 무대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떠하든지, 그녀는 혼자서 연주하는 것보다 다른 연주자와 함께 하는 것을 즐긴다. - 웹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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