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아티스트

La Divina ...마리아 칼라스

로만짜 2007. 5. 11. 01:24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디바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그리스 태생의 전설적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는 사람의 마음 저 깊은 데까지 도달하는 자신의 목소리만큼, 그리고 그녀가 연기했던 오페라 무대의 비극적 여주인공만큼 처절하고 진지하며 그리고 비극적으로 살다 간 프리마돈나였다.
 

- 신이 내린 목소리
 

마리아 칼라스(1923~1977)는 미국의 그리스 이민 가정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지독한 근시에다가 뚱뚱했던 그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는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10살 무렵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녀의 천부적인 능력은 바로 아름다운 목소리와 훌륭한 표현력이었다.
1930년대 경제 공황기에 미국에서 맞이한 아버지의 파산과 부모의 이혼 등 불행 속에서도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만은 더욱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따라 다시 돌아 온 그리스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날개를 달게 된다.
그리스 왕립 음악원에서 만난 스승 이달고 여사의 교육으로 마리아 칼라스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프리마 돈나의 목소리로 가다듬어 진다.
그리스에서 마리아 칼라스는 90kg에 달하는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목소리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름 조그만 성공을 거두게 된다.

 

- 프리마돈나의 탄생
 

그러나 아버지를 찾아 다시 미국으로 돌아 와 두드린 세계 무대로의 길은 밝지 않았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오디션을 받았지만 탈락하고 만 것이다.
그후 힘들게 얻어낸 계약도 기획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또 다시 좌절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그 때 그녀에게 갑자기 기회가 왔다.

함께 일했던 이태리 출신 베이스 가수 레메니의 소개로 마리아 칼라스는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라 지오콘다’를 부를 기회를 잡게 된다.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이 무대를 계기로 마리아는 훗날 남편이자 매니저가 된 메게니니와 음악적 후원자인 당대 최고의 오페라 지휘자 세라핀을 만나게 된다.

이후 마리아 칼라스는 승승장구하며 인생 최고의 시기를 맞이한다.
풍부한 성량과 아름다운 목소리, 무대를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이시기 마리아 칼라스는 평생의 짐이었던 무거운 몸무게도 떨쳐 버린다.
일년만에 30여kg을 감량하여 명실상부 어떤 오페라에도 어울리는 가냘프고 아름다운 프리마돈나로 거듭난 것이다.

 

- 오나시스와의 사랑
 

이즈음 마리아 칼라스는 자신의 이후 생애를 좌지우지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세계적인 부호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에 감동한 오나시스는 그녀와 남편 메게니니를 자신의 배 크리스티나에 초대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부호가 만들어 낸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항해 여행이 끝날 즈음 마리 칼라스는 남편을 저버리고 오나시스의 연인이 되고 만다.

오나시봇“?빠진 마리아 칼라스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며 인생을 바쳤던 노래와 무대를 멀리 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무대에 서기보다는 오나시스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여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했고 자신의 연주 스케줄보다는 오나시스의 스케줄에 더 골몰했다.

마리아 칼라스는 오나시스와의 불같은 사랑으로 실상 몇 년간을 상류 사회의 파티 놀음에 빠져 음악을 내팽개쳤다.
이후 지인들의 간곡한 충고로 다시 무대에 오르기도 하지만 마리아 칼라스의 머리 속은 온통 오나시스 한사람만으로 채워지곤 하였다.

 

- 사랑의 상처
 

그러나 오나시스의 사랑은 쉽게 식었다.
오나시스는 세계적인 프리마 돈나를 자기 여자로 만든 것에만 만족할 뿐 마리아 칼라스를 평생의 동반자로 여겨주지는 않았다.
오나시스와 결혼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마리아 칼라스에게 어느날 청천 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날라 들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연인 관계를 유지하며 아직도 핑크빛 꿈이 젖어 있던 마리아 칼라스에게 애인 오나시스가 재혼했다는 소식이 들려 온 것이다.
그 상대는 바로 전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아내였던 재클린 케네디였다.

오나시스의 갑작스런 배신은 마리아 칼라스에게 도저히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그녀는 이 사건으로 황폐해졌고 기력을 탕진해 버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전성기와 같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세월이 다 가버렸음을 알아차린 마리아 칼라스는 쓸쓸히 뉴욕에 은둔하며 칩거하게 된다.

 

- 불멸의 디바로 기억
 

1965년 토스카를 공연한 뒤 오페라 무대를 떠난 마리아 칼라스는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열어 후진 양성에 힘을 쏟기 시작하였다.
이미 쇠해 버린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 줄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노래의 창법, 무대 위에 카리스마 그리고 그녀의 인생 속에 녹아 있는 노래에 대한 철학은 고스란히 제자들에게 전해졌다.

또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마리아 칼라스는 친구였던 디 스테파노를 돕기 위해 마지막 세계 연주 여행을 떠나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목소리도 정열도 쇠해 버린 마리아 칼라스에게는 무리한 연주 여행이었다.

여행 직후 다시 은둔하기 시작한 마리아 칼라스는 다시 한번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오나시스의 처절한 배신에도 마지막까지 그와 결합할 것을 희망했던 마리아 칼라스에게 오나시스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이후 마리아 칼라스는 생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채 파리에서 은둔한다.
그리고 1977년 마리아 칼라스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죽었던 여인 마리아 칼라스. 그녀의 인생은 짧았지만 그녀의 노래는 여전히 남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마리아 칼라스는 1950년대와 60년대 세계 문화계의 히로인이었던 인물이다.
세계 각지를 돌며 그녀가 보여주었던 많은 오페라 무대는 그대로 전설이 되었고, 그녀의 카리스마와 목소리에 사람들은 전율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마리아 칼라스는 전무후무한 디바로 자리 잡고 있다.
올 아테네 올림픽 개막식에서 그리스는 자신들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인물 중에서 단연 마리아 칼라스를 손꼽았다.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아테네 주경기장에서 사람들은 잠시나마 노래에 마음을 싣고 숙연해지기도 하였다.

 

Maria Callas

Maria Anna Sophie Cecilia Kalogeropoulos(마리아 칼라스)는 1923년 12월 2일 뉴욕에서, 그리스에서 아테네 약대를 졸업한 George Kalogeropoulos 와 여배우의 꿈을 가졌던 Evangelia Kalogeropoulos 부부 사이에서 태어남 .

1924년 어머니 에반겔리아와 마리아 칼라스

칼라스의 아버지는 뉴욕에서 약국을 개업하면서 발음하기 힘든 이름을 미국식 이름으로 바꾸라는 미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 이름을 칼라스(Callas)로 바꿈.

1929년 7월 마리아 칼라스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아버지는 뉴욕증권시장의 폭락의 영향으로 약국을 팔아야 했음.

마리아가 7살때인 1930년 음악을 시작함.

10살 때 5월 어느날 마리아가 La Paloma(비둘기)를 피아노를 치면서 부르자 동네 사람들이 가득 모여서 노래가 끝날 때까지 떠나지 않음.

1934년 11살 때 뮤투얼 라디오 방송국의 아마추어 노래 경연대회에 출전해 라 팔로마를 불러 생애 최초의 1등상을 받음.

마리아 칼라스의 음악 교육을 위해 에반겔리아는 쟈키와 마리아를 데리고 그리스로 떠남(1937년)

1938년 마리아 칼라스는 아테네에 있는 National Conservatoire에 입학이 허가돼서, Maria Trivella밑에서 공부를 시작.

15세에 학생들이 공연하는 '카발레리나 루스티카나'에서 산투자 역할을 맡아 일등상을 탐.

1939년 마리아는 마리아에게 최고의 선생님이자 최고의 어머니인 엘비라 데 히달고(Elvira de Hidalgo)를 만나 아테네의 최고 음악원(Santuzza)에서 학비를 면제 받고 이달고의 개인지도를 받는 학생이 됨.

이달고와 마리아 칼라스(1957)

이달고의 다른 제자들과 칼라스

1940년 주페의 오페레타 '보카치오'(Boccaccio)로 국립 Lyric Theatre의 프로 무대에 데뷔.큰 성공을 거둠.

아테네에서의 마리아 칼라스(1940)

1941년 이달고 선생의 노력으로 17세의 나이로 아테네 오페라단의 평생 회원이 됨.

1942년 토스카(Tosca)로 아테네의 Park Summer Theatre Kaftmonos Square에서 공식 데뷔.

1944년 마리아는 1937년부터 만나지 못하고 있던 아버지의 편지를 받음.

1945년 8월 3일 아테네에서 첫 번째 솔로 리사이틀, 작별 콘서트를 하고 미국으로 여행갈 돈을 모음.

9월에는 뉴욕으로 돌아와 그녀의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했지만 알아주지 않았음.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를 들은 Metropolitan 오페라단의 단장인 에드워드 존슨이 메트로폴리탄의 1946년에서 1947년 시즌에서 베토벤의 피델리오와 푸치니의 나비부인의 주역을 맡으라고 제의했지만 놀랍게도 거절. 이유는 피델리오를 영어로 부르는 것이 싫었고 81Kg의 몸으로 15세의 가냘픈 여자 역할을 하는 것이 싫어서 였다고 함.

1946년 말 마리아를 좋아하던 바가로지는 이태리 에이전트 오타비오 스코토의 도움을 받아 시카고 오페라단을 되살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세르지오 파일로니(Sergio Failoni)의 지휘와 칼라스의 주역으로 투란도트를 연주하려고 했지만 1월 공연을 몇 일 남기고 Chicago company 의 파산으로 결국 공연을 하지 못함.

1947년 Chicago company의 일원인 이탈리아 베이스 가수 Nicola Rossi Lemeni로부터  

1947년 Verona Opera Festival의 예술 감독인 Giovanni Zanatello를 소개받음. 그는 칼라스와 'La Gioconda'를 공연하기로 계약.

 

1947년 6월 27일 칼라스는 나폴리에 도착. 도착한 다음날부터 'La Gioconda'를 연습하기 시작. 몇 일 후에 그녀는 오페라를 사랑하는 부유한 이탈리아 사업가인 Giovanni Battista Meneghini를 만남.

1947년 8월 3일 Tullio Serafin의 지휘로 La Gioconda의 주역으로 이탈리아 무대에 데뷔. 공연은 충분히 성공했지만 그녀는 주목을 받지 못함.

12월 30일 베니스의 La Fenice에서 이탈리아 어로 '트리스탄과 이졸데' 를 Serafin 지휘로 공연, 이후로 이탈리아에서 더욱 오래 계약, 주로 'Turandot'를 공연. 투란도트 공연 후 칼라스의 명성이 확고해짐.

1948년 부터 칼라스는 밀려드는 출연 요청으로 매우 바빠짐. 그녀는 베니스, 제노바, 로마의 Caracalla's Bath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 투란도트 (Turandot), 'Leonora'(Forza del destino)를 공연. 연말에는 아이다(Aida)와 노르마(Norma)로 데뷔.

1948년 11월 30일 플로렌스의 테아트로 코뮤날레에서 전설적인 노르마(Norma)공연.

1949년, 처음으로 'Die Walkure'의 'Brunnhilde'역을 11일 동안 공연. 칼라스는 Serafin의 강요로 La Feniced에서 청교도 (I Puritani)의 Elvira역이었던  Margherita Carosio가 독감에 걸려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자 공연 일주일 전에 칼라스로 교체. 이 사건은 베니스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고 칼라스의 명성은 확고해져서 이제 세기의 소프라노가 됨.

그녀는 바그너(Wagner)의 "니벨룽겐의 반지"중 'Brunhilde'와 불과 3일후 벨리니(Bellini)의 청교도(Puritani)중 'Elvira'를 연기. 이같이 여러 주인공을 연기하는 것은 오페라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놀라운 일임.

1949년 4월 21일 Verona에서 G.B.Meneghini와 결혼하고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Buenos Aires의 Teatro Colon에서 공연.

남편인 동시에 매니저인 Meneghini의 도움으로 그녀는 이후 2년동안 이탈리아와 외국 공연으로 경력을 쌓음.

1949년 11월 마리아 칼라스의 최초의 판매용 음반을 체르타(Certa) 음반사에서 녹음.

메네기니와 칼라스

1950년 3월 밀라노의 'La scala'에서의 아이다 공연을 Renata Tebaldi대신 했지만 라 스칼라의 매니저인 안토니오 기링겔리는 칼라스를 냉대함.

1951년 12월 7일 그녀는 La Scala에서 'I Vespri Siciliani'로 갈채를 받음.

베르디의 사망 50주년 추모 때 마리아는 Florence의 Comunale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나폴리에서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  Maggio Musicale극장에서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를 연기.

1951년 1791년 하이든에 의해 쓰여진 오르페오와 유리디체를 최초로 공연함.

1951년 라 스칼라와 최소한 3작품의 주연, 시즌 중 30회 공연이라는 조건으로 계약.

1952년 7월 29일 칼라스는 EMI와 녹음 계약을 서명하고 8월에는 'Don Giovanni'의 "Non mi dir" 시험 녹음.

1952년 EMI와 계약을 이룬후 라 트라비아타 공연 때 EMI의 사장인 윌테레그의 아내인 엘리자베쓰 쉬바르츠코프(Elizabeth Schwarzkof)는 칼라스를 칭찬하며 라 트라비아타를 더 이상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함 .

슈바르츠코프와 마리아 칼라스

1953년 2월 Florence에서 EMI를 위해 'Lucia di Lammermoor'를 첫 번째로 상업적 녹음.

연말에는 칼라스는 La Scala에서 Serafin의 지휘로 'I Puritani' 와 'Cavalleria Rusticana'를 시작으로 Victor de Sabata 지휘로 유명한 'Tosca'를 녹음.

시카고의 Lyric극장에서 그녀는 노르마(Norma), 람메르무어의 루치아(Lucia di Lammermoor), 그리고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를 공연.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소프라노라고 인정받음.

1954년 마리아는 연출가인 비스콘티를 사랑하게 되었고 단시간에 30Kg을 감량 모두를 놀라게 함. 그녀는 La Scala에서 4개의 오페라를 녹음하고 그녀는 런던에서 처음으로 두 번 공연.

11월 미국으로 돌아와 'Norma'를 공연, 시카고에서 'La Traviata'와 'Lucia di Lammermoor'를 공연.

12월 영화 감독 Luchino Visconti와 La Scala에 1954-55년 시즌 개막을 Spontini의 'La Vestale' 공연을 개막.

감량하기 전의 칼라스와 감량 후 칼라스 (둘 다 투란도트 공연 때 사진)

1955년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로 칼라스와 Visconti는 크게 성공.

1955년 11월 17일, 시카고 리릭 오페라 극장에서 Madama Butterfly를 공연 하고, 관객들로 부터 박수 갈채를 받은 후, 무대 뒤에서 자축연을 벌이고 있던 칼라스는 법원으로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전해받는다. 전 매니저인 Eddie Bagarozy가 1947년도의 계약서를 근거로, 자신이 칼라스의 유일한 매니저라고 주장하면서 칼라스가 번 돈의 일부와 그동안 칼라스로 인하여 생긴 경비 30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법정 밖에서 해결되었는데,합의 내용은 비밀에 붙여졌다.

1956년 10월 28일, 마리아 칼라스는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선다. 하지만 타임지는 이맘때에 칼라스 어머니와의 인터뷰 기사를 싣는다. 이는 상당히 예민한 부분으로, 칼라스는 평소에 어머니가 자신의 유년시절을 앗아갔다고 자주 비난했으며, 그녀가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본 것은1950년 멕시코에서 였는데, 그때 칼라스는 두 번 다시는 어머니를 찾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죽을 때까지 이 맹세를 지켰다고 함.

1956년 10월 29일: 뉴욕의 Metropolitan에서 처음으로 'Tosca'와 'Lucia'이후, 'Norma'공연.

1957년 4월: 마리아와 Gavazzeni와 Visconti는 80년간 잊혀져 있던 도니제티 (Donizetti)의 안나 볼레나(Anna Bolena)를 기획. 비평가들은 열광함. Elsa Maxwell이 개최한 모임에서 그녀는 그리스의 선박왕 Aristotele onassis를 만남.

1958년 1월 2일 "Opera di Roma"에서 이탈리아의 Gronchi대통령 앞에서 노르마(Norma)를 공연했으나 몸이 좋지 않아 약을 먹고 노래 함. 마리아는 공연중간에 그만 둠. 청중들은 화가 나서 그녀를 비난 함. 얼마 후 극장주와 격렬히 싸우고 극장과의 관계를 끝냄.

5월 La Scala에서 'Il Pirata' 공연 중에 그녀는 감독 Antonio Ghiringhelli와 불화로 남은 기간동안 La Scala에서 공연하지 않을 것을 결심.

>11월 6일 Metropolitan Opera의 Rudolf Bing감독은 다음 시즌 공연에서 그녀를 해고.

12월 19일 파리에서 Paris Opera의 gala concert에서 화려한 등장. onassis를 비롯한 유명인사 청중들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

노르마 공연을 취소하고 나오는 칼라스

1959년 7월 그녀와 남편은 Churchill을 포함한 다른 인사들과 onassis의 요트인 'Christina'에 초대 받음. 이 여행에서 칼라스와 오나시시는 연인이 되고 남편과의 결혼은 끝남.

칼라스와 오나시스

1960년 칼라스는 모든 공연을 포기하고 오나시스에게 헌신.

1961년 La Scala에서 Medea 공연. 런던에서 로시니, 도니제티,벨리니의 아리아 녹음.

1962년 5월 19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6년 뒤 자기에게서 오나시스를 빼앗을 케네디 대통령의 영부인 재키를 만남.

1963년 파리에서 6월 5일 Champes Elyseacutees극장에서 조르주 프레트르(Georges Pretre) 지휘로 공연. 대성황을 이룸. 이 때 마리아는 파리의 애비뉴 Fock로 이주.

1964년 1월  가장 위대한 공연중에 하나로 알려진 Zeffirelli와 Covent Garden에서 토스카를 공연

5월에는 파리의 "Opeacutera"에서의 노르마(Norma)와 토스카(Tosca) 공연은 여전히 기억될 만한 공연 기록. 각각의 공연은 성공했지만 칼라스는 그녀의 목소리가 쇠퇴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

1965년 2월에 파리에서 '토스카'를 아홉번 공연했음

3월에 뉴욕의 Metropolitan으로 개선해서 'Tosca'를 두 번 공연.

5월에 파리에서 'Norma'의 다섯 번 공연을 책임짐. 그녀는 피곤함을 느꼈지만 취소할 순 없었다.

7월에 Covent Garden에서 'Tosca'를 네 번 공연하기고 계획.

칼라스는 공연을 취소하라는 의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7월 5일 Royal Gala에서 공연.

이 공연은 그녀의 마지막 공연임.

파리에서의 칼라스

1966년 칼라스는 파리에 36 Avenue Georges Mandel로 이주. 

1968년 미국 시민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취득.

10월 20일 오나시스는 John F. Kennedy의 미망인인 Jacqueline Kennedy과 결혼, 마리아는 종말로 치닫기 시작.

1969년 칼라스는 Pier Paolo Pasolini가 감독한 비오페라 영화 Medea에서 메디아 역할을 연기했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함.

1971년 마리아는 매우 비밀스럽게 뉴욕의 줄리어드(Julliard) 음악 학교 학생들을 가르침, 그녀는 이탈리아의 새로운 법에 따라 Meneghini와의 이혼. 그녀는 Giuseppe di Stefano와의 오랜 우정을 돈독히 하고 그와 더욱 중요한 극장의 성공을 준비.

스테파노와 칼라스

1973년 Turin's Teatro에서 시칠리아의 저녁기도(I Vespri Siciliani)의 연출을 시작.

1974년 가을 스테파노와 함께 10월 5일과 10월 8일에 서울 이화여대 강당에서 두번 공연.'카르멘''라 죠콘다',메피스토펠레',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쟈니 스키키','라 보엠',토스카'등을 연주

1974년 11월 11일 일본의 삿뽀로에서 Di Stefano와 마지막 투어 공연. 이 공연이 마지막 대중 공연이 됨. Di Stefano와 연락을 끊음.

1975년 오나시스 죽음. 이때 오나시스는 재키와 이혼소송을 준비 중이었고 전 처였던 티나는 74년 폐암으로 사망.

마리아는 매우 큰 충격으로 파리에서 사실상 운둔생활을 함.

1977년 9월 16일 마리아는 심장마비로 Avenue Georges Mandel의 아파트에서 혼자 사망. 그녀의 마지막 순간의 유일한 목격자는 그녀의 간호원과 집사였다. 그녀의 유해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에게해에 뿌려짐.

칼라스의 유골을 에게해에 뿌리는 칼라스의 어머니 에반겔리아



♬ C.W. Gluck "Alceste" 中 Divinite's du Styx
글룩의 "알체스테" 中 알체스테의 아리아 "스틱스의 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