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칸타타

바흐/칸타타 BWV 106 '애도 행사' (Actus tragicus) - 칼 리히터(지휘) 뮌헨 바흐 오케스트라 & 합창

로만짜 2011. 9. 27. 22:34

      J.S. Bach ; Kantate Nr.106 "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 " BWV 106 (Actus tragicus) 바흐: (장례) 칸타타, BWV 106 "하나님의 시간이 최상의 시간이로다"

      1. Sonatina (Molto Adagio) 2a. Chorus 2b. Arioso Tenor 2c. Aria Bass 2d. Chorus 3a. Aria Alto 3b. Arioso Bass - Chorale Alto 4. Chorus 모두 이어 듣기 Hertha Topper, alto / Ernst Haefliger, tenor Theo Adam, bass / Munchener Bach-Orchester & Chor Karl Richter. cond * 이하 해설은 퍼온 것, 생면부지의 글 쓴이에게 존경과 감사를 전합니다. ^^ * 오늘 바흐가 들려주는 죽음의 노래를 들어보자. 바흐는 그의 모떼또들을 비롯하여 죽음을 소재로 한 곡들을 여럿 지었지만 특히 소박하고 절제된 아름다움 속에 죽음을 담담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칸타타 106번, "하나님의 시간은 최상의 시간이로다" (추모행사)이다. 이 칸타타는 BWV 80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우리의 주님은 견고한 요새로다"와 같은 장대함도 없고 BWV 147 "Herz und Mund und Tat und Leben, 마음과 말씀과 행위와 생명"과 같은 화려함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BWV 4 "Christ lag in Todesbanden, 그리스도는 죽음에 묶이셔도" 처럼 비장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 칸타타는 사랑받을만 하다. 길이는 그리 짧지 않으나 반주부의 악기 구성이 단순하고 느낌이 소박하며 끝 곡 외에는 대규모 합창이 없고, 중간 중간 짧은 합창과 독창이 많아서 큰 규모의 곡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독창은 소프라노, 알토, 테노레, 바쏘가 고루 나오며, 반주는 시종 두 대의 블록플뢰테(플라우토 돌체)와 두 대의 비올라 다 감바가 맡고 콘티누오가 첨가된다. 끝 곡의 합창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담담하고 죽음에 대해 차분히 명상하는 분위기이다. 전체가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로 매우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다. 작곡 연대로 볼 때 이 곡은 1707년 뮐하우젠 시대에 작곡된, 초기 칸타타의 걸작이다. 율법의 결말로서 피할 수 없는 죽음과 구원으로서의 죽음이 대비되면서 마지막에는 삼위일체를 찬양하며 종결한다. 이곡이 장례를 위해 작곡된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과연 누구의 장례를 위한 것인지는 명확치 않고 몇 사람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 또한 브람스의 '독일어 레퀴엠'과의 연관성에 대한 논의가 있기도 하다. 이 칸타타를 들으면서 필자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이 곡이 바흐보다 1세기 앞선 쉬츠의 장례 음악 'Musikalische Exequien무지칼리셰 엑셐비엔'의 후속작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약 바흐가 위대한 선배의 이 걸작을 알았다면 분명히 그 자신도 그런 곡을 쓰고 싶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동기를 얻거나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쉬츠, 바흐, 그리고 브람스의 작품들은 죽음에 대한 그 심오한 성찰과 그 음악적 위대성으로 인해서 독일인에 의해 작곡된 '죽음 삼부작'으로 묶을 만하다고 여겨진다. 1. Sonatina - Molto adagio 칸타타는 비올라 다 감바의 이중주로 시작된다. 두 대의 비올라 다 감바가 조용하고 느릿하게 연주하는 고풍스런 도입부를 듣자마자 곧 당신의 마음이 녹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아 하는 한숨이 흘러 나올 것이다. 이것은 이 곡의 아름다움에 찬탄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아름다운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자신도 모르게 이 곡이 이끄는 데로 조용한 명상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뒤이어 블록플뢰테가 전개해 나가는 맑고도 부드러운 이중주는 때가 끼어 찌든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듯한 위로감을 준다. 이 이중주는 눈물겹도록 아름답기 때문에 듣다가 곧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회한과 슬픔과 위안과 기쁨이 이 곡의 끝까지 계속 될 것이다. 이 소나티나는 이 칸타타의 서두로서 더없이 어울리는 신포니아이다. 2.a 합창 또는 4중창 "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 하나님이 정하시는 때가 가장 좋은 때로다."라는 가사의 호모포닉한 4/4박자 합창이 시작되고 "In ihm leben , weben und sind wir 그분 안에서 우리가 살고 활동하며 또한 존재한다"라는 가사(이 가사는 원래 사도 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광장에서 행한 설교 가운데 나오는 사도행전 17:28의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에서 가져온 것이다.)에 의한 3/4박자의 다소 활기있는 푸가가 뒤따르며 "solange er will 그분이 원하실 때까지"로 푸가 부분을 마치고, 다시 4/4박자의 호모포닉한 "In ihm sterben wir zur rechten Zeit, wenn er will 그분이 원하시는 바로 그때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죽는다"로 들어간다. 사람이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고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는 최상의 때라는 강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굳은 신뢰가 이 칸타타의 주제로서 제시되는 부분이다. 2.b 아리오소 (테노레) 2.a의 합창에서 중단 없이 이어진 테노레의 아리오소는 "Ach, Herr, lehre uns bedenken, dass wir sterben mußen, auf dass wir klug werden 오, 주님,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음을 기억하도록 가르치사 우리로 하여금 지혜롭게 하소서"을 렌토의 다 단조 4/4로 노래한다. 이 가사는 모세의 시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시편 98:12을 인용한 것인데,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의 겸허한 삶의 태도를 노래한다. 이 시편을 두어 구절 더 인용해본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2.c 아리아 (바쏘) Vivace 3/8박자의 비바체로 바쏘는 엄하게 재촉한다, "Bestelle dein Haus; denn du wirst sterben und nicht lebendig bleiben 네 집을 정리하여라. 너는 죽을 것이며, 살지 못하리로다." 플라우토 돌체의 반주도 이 다급한 재촉을 더욱 부추긴다. 가사는 이사야 38:1에서 가져온 것이며 이는 히스기야 왕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이 가사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말씀과 달리 히스기야 왕은 죽지 않았다. 왕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의 병을 낫게 하시고 십오년을 더 살게 하셨다. 물론 이 곡에서는 이 내용을 노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사의 출처가 되는 이야기의 이러한 내용은 우연하게도 이 칸타타의 주제를 어느 정도 시사하며, 죽음이 정복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2.d 합창-소프라노 솔로 Andante 이 합창은 바쏘의 재촉을 이어 받아서 엄숙한 선언을 대위법적으로 느리게 노래한다. "Es ist der alte Bund: Mensch, du mußt sterben! 이것은 옛 계약이다. 사람아, 너는 죽어야만 한다!" 가사는 집회서(시락서) 14:17-18에서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다. (집회서의 해당 부분의 내용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니 자선을 베풀고, 오늘의 행복을 기뻐하며 살라는 것이다.) 옛 계약이란 어떤 것인가? 지고의 행복 상태, 절대자와의 완전한 교제 속에 살던 그때 주어졌던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약속인가? 아니면 결국 이 신과의 교제의 삶을 유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타락의 길을 택한 뒤에 주어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라는 선고인가? 어쨌든 죽음은 인간을 규정하는 가장 냉혹하고 엄격한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 즉,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절망적 상황은 구원자를 애타게 고대하게 한다. 이 간구를 소프라노가 솔로로 노래한다. "Ja, komm, Herr Jesu! 그러하오면, 주 예수여, 오소서!" 간절하면서도 맑고 아름다운 노래이다. 다시 대위법적인 합창이 나와서 소프라노의 간구와 얽힌다. 옛 판결로 죽음의 사슬에 얽매인 연약한 인간이 구원자가 오기를 애타게 기원하는 모습을 간결하고도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로써 제2곡이 끝난다. 3.a 아리아 (알토) 제2곡의 간구가 끝나면 콘티누오가 먼저 상승 음계를 연주하면서 제3곡이 시작된다. 알토가 "In deine Hande befehl' ich meinen Geist; du hast mich erloset, Herr, getreuer Gott.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당신이 나를 해방하셨습니다, 주여, 나의 신실한 하나님이시여"라고 내림사단조로 노래하고 반주는 시종 콘티누오가 맡는다. 이 가사의 앞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면서 한 말이다 (누가복음 23:46). 동시에 이 가사 전체는 시편 31:5(원전인 히브리 성서와 독일어 번역본 성서에서는 6절)을 인용한 것이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구원을 고대하던 인간은 결국 그 구원을 확신하면서 절대자에게 자신을 맡긴다. 3.b 아리오소 (바쏘)-알토 투티 알토의 짧은 아리아가 끝나고 콘티누오가 계속 흐르는 가운데 가장조의 바쏘 아리오소에 의한 구원의 선언이 이어진다. "Heute wirst du mit mir im Paradies sein.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가사는 누가복음 23:43에서 인용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양편에서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악한들 중 하나가 자비를 구하자 그에게 하신 말씀이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2-43) 인간이 지닌 모든 한계와 비참함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신은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또 구원하신다. 누가복음 23:32, 39에 행악자(까꾸르고스)라고 성서에 기록된 이 사형수는 흉악한 악행 끝에 잡혀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하면서 혹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을 구하고자 무력 저항단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잡혀서 처형당하면서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을 참고한다면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단,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누가복음과는 달리 두 강도가 모두 예수를 욕하였다고 적고 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이 둘을 '레-스따이'라고 부르는데 이말은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제국에 무력으로 저항운동을 벌이던 무장강도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는 옆에서 자신과 함께 고통 당하며 죽어가는 연약한 사내를 본다. 아직도 혈기와 오만함을 잃지 않고 이 연약한 사내를 조롱하는 자신의 동료 사형수와는 달리, 그는 이 연약한 사내가 곧 인간의 모든 한계와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신과 함께 고통당하는 신임을 알아챈다. 그는 그 연약한 신에게 자신을 맡긴다. 신은 매일 우리와 함께 고통 당하고 우리의 죽음과 함께 죽음 당한다. 어떤 절대자가 우리의 고통, 우리의 슬픔, 우리의 한계를 함께 당하고 경험하지 않는다면, 저 먼 하늘에만 있다면, 인간과 동떨어져서 뛰어난 지적 능력과 힘으로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시하고 가르치기만 한다면 그런 그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것들이 다 절대자로서의 모습으로서 중요시 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다만 그 뿐이라면 그는 우리 인간과는 관계없는 이론적인 신, 관념 속의 절대자일 수 밖에 없다. 초월자인 신은 인간이 되어야 하고 인간으로서 함께 고통 받으며 인간으로서 함께 죽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그가 인간의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바쏘의 아리오소는 곧 알토 투티에 의해 불려지는 코랄과 어우러지고 두대의 비올라 다 감바가 반주에 가세하여 전체적으로 폴리포닉하게 엮어지면서 아름다운 코랄 편곡이 된다. 이 코랄의 가사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1524)에 의한 것이다. Mit Fried' und Freud ich far dahin 평화롭고도 즐겁게 나는 저곳으로 떠나간다 In Gottes Willen, 하나님의 뜻 가운데, Getrost ist mir mein Herz und Sinn, 나의 마음과 넋은 확신에 차고 Sanft und stille. 평온하며 고요하다. Wie Gott mir verheissen hat: 하나님이 내게 약속하신 바와 같이 Der Tod ist mein Schlaf worden. 죽음은 나의 잠이 되리라. 이 곡의 끝 부분은 바쏘 의 아리오소가 끝나고 "Wie Gott mir verheissen ..."의 합창이 비올라 다 감바의 반주로 느릿하게 이어지면서 종결하는데 이 짧은 종결부는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루터의 이 코랄 가사에는 두 가지의 모순된 사상이 엿보이는데, 죽음을 통하여 저 세상, 곧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간다는 사상과 죽음은 이 최후의 심판 때에 있을 부활에 이르도록 잠자는 상태라는 사상이다. 이 모순에 대해 여기서 자세히 해설할 수는 없다. 그저 여기서 노래하는 죽음은 이미 얻은 구원의 약속에 따라 궁극적 구원의 상태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이제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 옛날의 엄격한 멸망의 선고가 아니며 공포의 대상도 아니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멸망은 구원으로 바뀌었다. 4. 코랄 합창 플라우토 돌체와 비올라 다 감바가 모두 참여한 단순하고 짧은 서주로 곡이 시작되면 호모포닉한 합창이 시작된다. 코랄 가사는 아담 로이스너에 의한 것이다. Glorie, Lob, Ehr und Herrlichkeit 영광과 찬양과 존귀와 위엄이 sei dir, Gott Vater und Sohn, bereit', 성부와 성자시여, 당신들께 있기를 Dem Heil'gen Geist mit Namen! 또한 성령의 이름 위에 있기를! Die gottlich Kraft 하나님의 능력이 Macht uns sieghaft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도다, Durch Jesum Christum, Amen.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멘 합창은 "macht uns sieghaft"까지 단순한 코랄 선율을 호모포닉(homophonic)하게 노래한다. 이윽고 "durch Jesum Christum"에 이르면 갑자기 allegro의 대단히 활기있고 복잡한 푸가가 된다. 썩 길지는 않지만, 구원을 베푸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그리고 직접 인간이 되어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예수의 이름을 찬미하는 화려한 푸가는 이 칸타타를 끝맺기에 손색이 없다. 합창은 환희에 가득 차서 "두르히 예줌 크리스툼"을 외치며 엮어나가고, 종결로 치달으며 반복되는 아멘 다음에 마지막으로 합창이 다시 한 번 아멘을 외치면 플라우테 돌체와 비올라 다 감바는 이 아멘을 그대로 받아서 피아노(여리게)로 응답함으로써 이 칸타타는 끝맺는다. * 바흐와 죽음 * 단지 음악적인 면에서 본다면 바흐의 칸타타를 소개함에 있어서 이 곡이 첫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보다 크고 웅대하며 기법적으로도 훨씬 정교하고 다채로운 곡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곡은 단순하고 소박한 가운데 굳이 외부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 아름다움과 깊이가 있다. 그리고 이 곡에는 바흐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죽음에 대한 태도가 있다. 그것은 절대자 안에서 살며 활동하다가, 그가 부를 때 기쁘게 그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의 시간은 최상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바흐는 만년에 시력을 잃고 암흑 속에서 살았다. 앞을 볼 수 없는 처지에서도 그는 악보를 구술하면서 만년의 대작이자 그의 생애를 총 결산하는 Die Kunst der Fuge (푸가의 기법)을 작곡했다. 그런데 그는 이 푸가의 기법의 마지막 곡을 자신의 이름인 B-A-C-H를 새겨 넣은 "세 개의 주제에 의한 푸가"로 작곡함으로써 자신의 생애를 결산하는 곡으로 삼으려 했었던 듯 하다. 그러나 그는 이 곡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푸가의 기법>의 종결곡은 끝을 맺지 못하고 도중에 끊어져 버린다. 그 곡을 끝내는 것과 상관없이 신은 '이제 그만 그것들 다 남겨두고 오라'고 그를 부른 것이다. 사람들은 도중에 끊어져 버리는 이 곡을 어떻게든 끝맺으려고 바흐의 코랄 편곡 중 한 곡을 끝에 붙여 연주한다. (조르디 사발이 이끄는 에스페리옹 XX의 연주처럼 미완성 부분에서 끝내고 마는 연주도 있다.) 원래 바흐의 아들 프리드만이 유고를 출판하면서 이 코랄을 붙여 넣었다. 이 코랄은 바흐가 원래 이 곡집에 포함시키려던 것이 아닌 것으로 해석하여 일반적인 출판에서는 제외하지만, 이 코랄이 푸가의 기법의 종곡과 성격적으로 잘 어울리므로 이 곡을 덧붙여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 연결이 자연스럽다. 이 코랄의 이름은 "Vor deinen Thron tret' ich hiermit 여기서 제가 당신의 보좌로 나아갑니다"이다. 그의 미완성인 최후의 작품을 장식하는 곡으로서 참으로 잘 어울리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 코랄 선율은 "Wenn wir in hochsten Noten sein 우리가 지극한 곤궁에 처해 있을 때"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같은 선율에 두 가지의 코랄 가사가 다 쓰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그의 칸타타 BWV 161 "Komm, du susse Todesstunde 오라, 너 달콤한 죽음이여" 가 있다. 종교적 이해 없이 제목을 잘못 읽으면 염세주의로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성격의 곡은 결코 아니다. 또한 삼위일체 축일 후 열여섯 번째 주일을 위해서 작곡한 BWV 8, 27, 95, 161도 모두 죽음을 소재로 한 곡들이다. 이런 곡들을 통하여 바하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다. 바하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하여 얻어지는 궁극적인 안식이며, 신을 앙망하는 자 모두가 동경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하가 죽음 예찬론자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생을 긍정하는 수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으며 그의 작품 속에는 그의 끈질긴 생의 욕구를 유감없이 느낄 수 있다. 또 그 자신이 그렇게 끈질기게 추구하는 생을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 생을 최후의 궁극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절대자 앞으로 갈 때 미련없이 버릴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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