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실내악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제 3번 in A major, Op.69 - 다니엘 샤프란, 첼로

로만짜 2006. 11. 7. 04:23

     

Ludwig van Beethoven
Cello Sonata No.3 in A major, Op.69
Daniel Shafran , Cello / Anton Ginzburg, Piano

     


베에토벤의 5개 첼로 소나타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1808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작곡되었다. 힘과 정열에 신선한 기품이 
넘치며 이전에 비해 훨씬 넓어진 음역, 두 악기의 장대하고 긴
밀한 구성력을 지닌 고금의 첼로 소나타의 걸작이다.
이 작품의 첫 악장을 들어보면 한 고독한 산보자가 인생과 예
술에 대해 유연하고 다채로운 사색에 잠겨 천천히 들판을 거닐
고 있는듯한 모습이 연상된다. 풍성한 자연은 그에게 넓고도 
너그러운 품을 제공한다. 베토벤이 아직 청각을 완전히 상실하
기 전 그는 숲과 언덕등 자연의 품에 대한 찬미의 말을 여러차
례 피력한 바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신비, 그것에 대
한 느낌을 이상화한 것이 교향곡 6번 '전원'이라면 이 첼로소나
타 3번은 그것의 축소판이라고 할수있다.
이 작품이 '전원'에 바로 뒤이어 나온 작품이란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는 이 시기에 가장 행복했고 삶에 대해 가장 긍정
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1악장 Allegro ma non tanto

2악장 Scherzo (Allegro molto)

3악장 Adagio cantabile-Allegro vivace


*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
베토벤이 남긴 다섯 곡의 첼로 소나타는 질적으로 극히 우수
하다. 일반적으로 3번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데 다른 곡들
도 모두 상당히 수준높은 곡들이다. 그 때까지는 실내악에서 
첼로의 역할이 바소 콘티누오/통주저음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
나지를 못했었는데 베토벤에 이르러서 첼로의 파트가 솔로로, 
완벽히 독주 성부로 발전했다는 사실은 음악史에서 특히 주목
되는 사건 중 하나이다. 젊은 시절의 베토벤 작품들이 별볼 
일 없다는 견해는 속단이다. 그 본보기가 바로 그의 첫 첼로 
소나타 F장조이다. 젊은 베토벤의 혈기와 서정성이 꽃피는 곡
이다.
피아노와 맞먹는 넓은 음역의 연주, 베토벤이 가장 행복한 시
절 작곡 베토벤의 첼로소나타 3번이 첼로음악의 신약성서라면 
바흐의 「첼로무반주조곡」은 구약성서가 된다.
이런 호칭을 듣는데는 이 음악의 탄탄한 짜임새와 기품높은 선
율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이곡이 첼로를 피아노와 대등한 위치
에 놓고 작곡된 최초의 소나타란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모차르트시대만 해도 독주악기로 첼로의 역할은 보잘 것이 없
었다. 이곡에서는 과거에 비해 첼로가 비로소 넓은 음역을 자
유롭게 넘나들게 되어 피아노의 분방한 연주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베토벤은 5개의 첼로소나타를 만들었는데 그중 이 3번이 가장 
뛰어나며 널리 알려진 곡이다. 이곡이 작곡된 것은 그가 38세
때인 1808년인데 비슷한 시기에 교향곡 5번, 6번(전원)을 잇달
아 내놓은 걸 보면 그의 창작열이 한창 타오르던 시기의 작품
임을 알수있다. 이 작품은 당시 전쟁기념관 관리자이며 절친한 
친구였던 이그나츠 공작에게 헌정되었고 작곡된 다음해에 첼리
스트 니콜라스 크라프트와 베토벤 피아노연주의 선구세대라 할
수있는 바로네츠 도로테아에 의해 초연되었다.

     

     


* Daniel Shafran *
다니엘 샤프란 Daniil Shafran (1923~1997)은 6살 때 아버지로
부터 첼로를 배우기 시작, Alexander Shtrimer에게 사사하였으
며 14세 때인 1937년 The USSR All Union Competition (전 소비
에트 연방 바이올린 첼로 콩쿠르에서)에서 최연소 1등 상을 수
상한 구 소련의 신동이자,  러시아 최고의 거장 첼리스트이다. 
레닌그라드 음악원을 겨쳐(1940년) 모스크바 음악원(1943년)에
서 첼로를 전공하고, 1949년,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The Worl
d Democratic Youth Festival (부다페스트 평화우호축제 음악 
콩쿠르) 및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콩쿠르 (The Hanus Vihan 
Memorial international Competion, 1950년)에서 로스트로포
비치 (Rostropovich)와 공동으로 일등상을 수상하였다. 어쩌면 
이 둘은 같은 소련 출생이면서 일생 숙명의 라이벌이라 할 수도 
있겠다. 1976년 로스트로포비치가 서방세계로 망명하여 부와 명
성을 누리는 동안 그는  철의 장막 속에 묻혀 묵묵히 연주활동
을 계속함으로서 서구인들에게는 철의장막 속에 가려진 뛰어난 
첼리스트로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그는 1960년에 처음으로 미국의 카네기홀 데뷰하여 서방에 그의 
천재성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당시 연주 곡목으로는 차이콥스키 
로코코변주곡과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소나타, 쇼스타코비치의 
소나타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되어, RCA 음
반사에서 이곡들을 녹음, 이 음반이 샤프란 최초의 스트레오녹
음이 된다. 그는  1970년 소비에트연방공화국으로부터 the Peop
le's Artist of the USSR (소비에트연방곡화국 최고의 국민예술
가)로 선정되었다. 
그의 사후, 영국의 첼리스트인 Steven Isserlis에 의해 Daniel 
Shafran MemrialFund가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