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이 바르샤뱌로 진출하기 전, 당시 바르샤바에서 크게 유행하던, 피아니스트가 관현악과 함께 화려한 테크닉을 과시하는 스타일의 작품양식의 영향 아래 씌여진 작품의 하나이다. 당시의 작품양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창조적으로 소화하여 흡수하려는 모습에서 그의 조숙한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쇼팽이 관현악을 다루는 법이 서툴렀다는 것은 정설이다. 하지만 쇼팽의 나이 18세로 어린 나이였던 1828년에 작곡한 [폴란드 민요에 의한 대환상곡, 작품3]과 이 [크라코비아크]를, 1년전인 1827년에 작곡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의 주에에 의한 [라 치 다램 변주곡, 작품2]와 비교하여 보면, 관현악을 다루는 기술이 눈부신 발전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라코비아크 변주곡'의 관현악 파트는 쇼팽의 6곡의 관현악 중에서는 가장 잘 씌여진 편 이다.
곡명인 [크라코비아크]는 풀란드 남부의 유서 깊은 도시 '크라쿠프(크라코프, 크라카우)'를 중심으로 한 그 지방의 경쾌한 민속 무용이다. 쇼팽이 2년 후인 1830년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의 피날레에서도 사용했던 2/4박자의 춤곡으로, 그 음악은 싱코페이션을 많이 사용하며 통상적으로 약박자에 악센트를 둔다. 이 곡은 1828년 말에 완성 되었다. 초연은 1829년 8월18일, 빈 방문 중에 이루어진 두 번째 연주회에서 쇼팽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이루어졌다.
실제로는 8월 11일에 열린 첫번때 연주회에서 초연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관현악 파트의 악보사보가 잘못된 부분이 많았고, 리어설을 하면서 단원들로부터 그 부분들이 다시 지적되어, 초연을 연기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연주회에서 초연에 성공함으로써 쇼팽은 좋지않은 기억들을 다 씻어냈을 뿐만 아니라, 양친께 보낸 편지에 '악장에서 조율사까지 이 곡의 아름다움에 감동했다고.'라고 아주 기분좋게 보고하고 있다. 1834년에 원보인 프랑스어 판이 파리에서 출판되었으며 차르토리스카 공작부인에게 헌정되었다.
안단티노 콰지 알레그레토. F장조, 3/4박자의 서주로 시작되는데 이 부분은 마주르카로 볼 수 있다. 피아노가 2중 옥타브의 유니즌 패시지를 연주하는 가운데 배후에서 호른이 한가롭게 상쾌한 분위기를 북돋우며 진행하다가, 알레그로의 카덴자풍의 패시지를 거쳐 주부의 '크라코비아크론도'로 진행된다. 이어지는 주부 론도는 알레그레토 논 트로포, 2/4박자로 현의 싱코페이션 리듬에 이어 5째 마디부터 피아노로 '크라코비아크'론도 주제가 나온다. 론도라고 하지만 이 주제와 교대로 병행단조의 부주제가 하나 더 있으며, 중간에 수없이 많은 화려한 패시지가 나온다. 서주는 독창적이고 아름답지만 이 주부는 상식적이라는 느낌도 피할 수 없다. (위에 임의로 자른 트랙에서 1트랙-서주/ 2트랙의 5번째 마디가 '크라코비아크'론도 주제/ 3트랙의 시작부가 부주제... 트랙의 공간이 이 부부분만 있어 여기서 잘랐으나 이 부주제는 2트랙부터 '크라코비아크'론도 주제와 교대로 진행되고 있슴)
이 서주에 대해서 쇼팽은 친구인 티투스 보이체호프스키에게 보낸 편지에 '도입부는 정말 독창적이야. 프록코트 정장을 한 벌 걸친 나보다 훨씬 더!'라고 적고 있다. 피아니스트인 코르토(Alfred Cortot, 1877-1962)는 그의 저서 '쇼팽의 모습들'에서 당시 18세이던 쇼팽의 독창성에 대한 솔직한 감각을 이 문장에서 찾아내어 프록코트 정장을 운운하는 것은 값싼 형식주의의 한 예라고 지적하면서 거기에서 벗어나 민족주의적 작품으로 향하려 했던 쇼팽의 첫 번째 시도중의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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