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V. Beethoven (1770∼1827) Symphony No.3 in E flat major, Op. 55 'Eroica'
Adagio assai (17'30")
Allegro vivace (06'33")
Allegro molto (13'25")
Kurt Sanderling, cond Philhamonia Orchestra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의 영향이 엿보이는 제1번 이나 제2번과는 달리 제3번 부터는 음악적으로 일대 비약을 보여준다.
즉 규모가 엄청나게 방대해졌고 독창적인 수법이 대담하게 구사되어 베토벤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1악장의 길이만 하더라도 종전 교향곡의 전곡과 거의 맞먹는다 또 제2악장에 장송행진곡을 사용했다던가 종악장에 장대하고도 호화장려한 변주곡을 넣은 것 따위는 당시로서는 커다란 모험이었다.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던 베토벤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는 곡이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의 혁명에서는 코르시카 섬 출신의 일개 포병 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이 반란을 평정하고 국내 최고 사령관 이 되었다.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유의 정신에 불타 있던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을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플라톤의 '공화국'을 숙독한 바 있었던 베토벤은 이 시대의 영웅의 자태를 보여준 나폴레옹을 자신의 작품으로 찬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33세 때인 1803년 여름 이 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하여 1804년 봄에 완성시켰다. 스코어의 표지에는 '보나파르트'라고 썼으며 밑에 자신의 이름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라 적어 이를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내려고 할 무렵,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빈에 퍼졌다.
이 소식에 분개한 베토벤은 그 사본의 표지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저 사나이도 역시 속된 사람이었어. 그 역시 자기의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민중의 권리를 짓 밟고 누구보다도 심한 폭군이 될 것이야." 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이후 다시는 나폴레옹에 대해 언급도 안 했다는 그는 2년 뒤 이 곡을 출 판하면서 '한 사람의 영웅을 회상하기 위해 작곡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17년 후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다는 보도를 듣고 비로소 '나는 그의 결말에 어울리는 적절한 곡을 써 두었다' 라고 했다는 베토벤. 이는 이 작품의 제2악장에 있는 '장송 행진곡'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웹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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