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악장 Allegro vivace (C장조, 4/4박자, 소나타 형식) 투티에 의한 유니즌이 팡파르처럼 울림으로써 시작하는 제1주제는 으뜸음 C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곧 이어지는 현악기만의 율동적인 모티브가 피아노로 제시됨으로써 포르테와 피아노의 극적 대비를 구축한다. 이러함 양면성에서 대화 형식으로가 아니라 융합 형식으로 이 작품의 성격이 잘 발전되어 나온다. 짧은 쉼표뒤에 연주되는 제2주제는 처음에는 현에 의해 연주되고 한마디의 쉼표가 나온다음 총합주로 새로운 동기가 나타난다. 그리고 주제 제시부의 종결부분은 민요조의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전개부는 두마디의 목관에 의한 선도에 의해 현악기가 잘게 새겨지는 리듬을 E♭장조로 연주하며 시작되어 제1주제를 F장조로 전개해 간다. 곡은 으뜸조로 되돌아가 재현부로 이어져 제1주제가 재현되나, 이것이 되풀이 될 때에는 E♭장조로 옮겨 간다. 제2주제도 으뜸조로 재현되고 종결부로서 화려하게 곡을 끝맺게 된다.
제2악장 Andante cantabile (F장조, 3/4박자, 소나타 형식) 다른 악장과는 대조적인 유려한 맛을 가지고 있고 잘게 새겨지는 음표와 장식적인 음표들이 종횡으로 구사되어 모짜르트 특유의 숨결이 긴 선율을 색채적으로 장식하고 있어 풍부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 이 제2악장은 미세한 제1바이올린의 영롱한 제1주제로 시작된다. 이어서 불안정한 단절된 음형으로 된 조바뀜의 변화를 거쳐 우아한 제2주제가 목관과 제1바이올린에 의해 연주된다. 특히 제1바이올린이 플룻과 유기적인 대응을 하며 진행되며, 지금까지의 제시부가 반복된 다음 전개부로 이어진다. 전개부는 비교적 짧고 조성도 유동적이다. 주로 경과적인 악구가 소재로서 취급되며 후반부에서 제2주제의 여섯잇단음표에 의해 전개되어 간다. 그리고 재현부는 제시부의 원형재현이 아니라 과거의 수법에서 한걸음 나아가 자유롭게 전개되어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종결부는 주로 제1주제를 소재로 하여 꾸며진다.
제3악장 Allegretto (G장조, 3/4박자, 3부형식) 주전개부의 미뉴에트는 미뉴에트다운 분위기보다는 오히려 차분한 감정으로 단아한 맛을 갖는다. 미뉴에트는 관례에 따라 2부로 구성되어 각기 반복된다. 주전개부의 후반부에 가서 목관악기만의 3중주로 주제를 대위법적으로 전개해가는 부분은 특히 인상적이다. 중간부의 트리오는 약간 해학적인 느낌도 주고 무곡적인 리듬감도 명확하다. 이 부분도 2부로 나누어져 각기 반복되며, 곡은 다시 처음의 미뉴에트로 되돌아가 연주하고 끝나게 된다.
제4악장 Molto allegro (C장조, 2/2박자, 소나타 형식) 이 악장으로 말미암아 이 교향곡을 '끝 곡에 푸가를 가지는 교향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악장에서는 푸가의 기법이 사용되기는 하나 바로크적 엄격함을 소나타 형식의 구조 속에 자유롭게 수용함으로써 바로크 푸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창출한다.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의 이른바 소나타 형식에서는 화성적인 취급이 일반적이나 여기서는 소나타 형식 속에 대위법적인 전개로 표현력을 극대화시켰다. 이러한 소나타 형식 속에 대위법적 수법을 도입한 시도는 모짜르트에 의해 비로소 예술적인 완성도를 갖게 된 것이다. 이 악장은 먼저 제1바이올린이 제2바이올린 그리고 비올라, 첼로 등의 반주로 폭 넓은 제1주제를 연주한다. 이 주제가 반복된 다음 새로운 부주제가 이어지고 쉼표를 거쳐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그리고 비올라의 3성부로 제1주제를 대위적으로 처리된다. 이어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들어와 발전되며 여기에 제1주제의 부주제도 소재로 사용된다. 반 마디의 쉼표를 거쳐 제1바이올린이 딸림조로 바뀌어 유연한 가락의 제2주제를 연주하며 여기에 제1주제의 부주제와 그밖에 음형이 얽혀 얼핏 제2주제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어지는듯 보여진다. 그러나 이 제2주제도 카논적으로 대위처리 되어지고 있으며, 이어 종결부도 대위적으로 취급되면서 주제 제시부가 끝난다. 이 주제 제시부가 되풀이된 다음 전개부로 들어가 정교한 대위법적인 처리가 전개되어진다. 특히 각 주제의 동기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가는 과정은 매우 인상적이다. 재현부는 제1주제가 돌아옴으로써 시작되어 순서대로 주제들이 재현되지만 제시부 때와 달리 대위적인 처리는 생략되어 짧아진다. 곡은 다시 전개부에서 이 재현부까지 반복되고 길다란 종결부로 이어진다. 이 종결부는 형식상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장대한 것이지만 처음에 나오는 푸가의 처리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리고 끝에 화성적인 처리로 대단원의 곡을 끝맺고 있다. 모짜르트 최후의 교향곡으로서 그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또한 가장 애호되고 있는 명곡이라 할 수 있다. '주피터'란 이름은 모짜르트 자신이 붙인 것은 아니며, 19세기 전반에 활약한 영국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요한 바프티스트 클라머가 이름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피터'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인 '제우스'의 로마식 명칭으로 이 곡이 갖는 정연한 고전적 형식미와 올림픽적인 명료한 악상과 부합된데서 이 최고의 신 이름을 붙인것으로 보여진다. 이 교향곡이 갖는 완벽한 구성미와 장려한 위풍으로 보더라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이 곡은 완벽한 곡상에 있어서나 그 규모의 크기에 있어서나 특출한 작품으로서 그의 기악곡 중 최고봉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주피터' 교향곡은 모짜르트의 3대 교향곡 즉 제39번 E♭장조, 제40번 G단조, 제41번 C장조의 마지막을 장식한 곡으로, 1788년 8월 10일에 비엔나에서 작곡,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에 앞서 작곡된 제40번이 그 해 7월 25일에 완성된 것을 감안한다면 불과 15일간에 이 교향곡을 쓴 것이다. 또한 이 곡을 가리켜 '끝에 푸가를 갖는 교향곡 Symphonie mit Schlssfuge'이라고 불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마지막 악장에 거대한 푸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행복감에 넘친 그러면서도 어딘지 인간의 허무함을 느끼게 하는 제39번, 비극적 절망 속에 정열의 화려함을 보이는 제40번, 청순하면서 풍부한 정감이 격조 높게 노래 되는 제41번. 서로 성격이 다른 모짜르트의 최후의 3대 교향곡은, 이 작품들이 완성된 1788년 모짜르트로서는 여생을 불과 3년을 남기고 있을 때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3년전 이미 그의 기악곡은 절정에 달해있다고 할 수 있다. 모짜르트의 만년의 기악곡은 고전적인 견고함을 구성하고 있으면서도 풍부하고 아름다운 선율을 마음껏 노래하고 있다. 즉 조형성과 선율성이 교묘히 융합되어 있는것이 특색이지만 이 '주피터' 교향곡만큼 그 정교한 융합의 천재성이 극명하게 뛰어난 것도 없을 것이다. '쥬피터'에는 다른 교향곡에서 엿볼 수 있는 하이든적 요소는 찾아볼 수 없고, 그 규모나 내용에서 베토벤과 같은 장대함에 모짜르트 특유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끝 악장의 대위법적인 묘사는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모짜르트 시대에 있어서는 대위법적인 수법, 특히 푸가와 같은 것은 바하 시대처럼 많이 쓰이지는 않았지만, 이 끝악장에 있어서는 푸가의 기법을 충분히 구사해서 복음악과 단음악의 완벽한 융합을 도모하고 있다. 제40번 g단조가 보여주는 비극미에 이어 그와 너무도 대조적인 이 제41번 '주피터'의 위엄과 화려함을 가리켜, 고통속에 승리를 이룩해내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에 비유하는 학자들도 있다. 어쨌든 제40번 g단조와 제41번 C장조는 가장 잘 대조를 이루는 작품이다. 혹자는 '하프너' 이후 모짜르트가 겪어야 했던 고통, 궁핍, 절망적 외로움 등이 승화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는 모짜르트의 음악과 삶의 모든 대립적 요소들, 예컨데 영감과 기교, 환희와 반성, 외향적 힘과 내향적 수줍음 등이 하나의 거대한 통일 구조로 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자필 악보는 베를린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Nikolaus Harnoncourt 1929 - ) "분명 세 개의 모차르트 교향곡 제39번, 제40번, 제41번은 인간이 목적지로 가기 위해 택한 일종의 길을 나타냅니다. 이 마지막 세 교향곡의 첫 곡은 E플랫 장조인데, 이것은 사랑의 조성이며 동시에 '의례적 장중함'의 조성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시작해 모차르트는 G단조 교향곡으로 넘어가 앞선 모든 것이 의심되는 깊이 있는 단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리고 주피터 교향곡의 현란한 C장조로 이어지는데, 이 곡에서는 모든 것이 해결되고 전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사람들이 하모니 속에 평온함을 느끼게 합니다. 모차르트는 41개의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G단조는 25번 교향곡과 함께 두 곡밖에 없습니다. 당시에는 G단조가 죽음과 슬픔의 조성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한숨의 동기가 나오는 첫 주제 악장에서는 단 한 개의 음도 바로 연주되지 않습니다. 모든 음은 위에서 아래로, 또는 그 반대로 연결되는 자식음인 아포지아투라(appoggiatura)를 갖고 있어서 매우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 흐릿해집니다. 마치 물방울을 통해 보는 것처럼 불명료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악장은 '주피터' 교향곡에서 살짝 숨겨져 있기도 한 푸가 주제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E플랫 장조인데 마치 첫 번째 악장의 악몽을 완전히 없애려는 듯,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을 호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차르트는 우리로 하여금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하고, 그다음 하늘을 올려다보게 합니다. 아마도 그는 신의 손에 들린 펜대였을 것입니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기념 축제에서 축하 연설의 한 부분 1953년 고음악을 연구하는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을 창설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작곡된 시대의 악기와 연주방식으로 연주하는 당대연주의 선구자로서 서양음악 연주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그는 몬테 베르디의 음악을 현대에 되살려냈고, 바흐 르네상스를 주도했으며, 모차르트 해석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흔히들 대중들이 인식하는 모차르트의 음악이란 행복감이란 단어로 요약된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항상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 들여지는데 비해 아르농쿠르의 모차르트 연주는 때로는 자극적이고 선동적이기까지 하다. 기존의 모차르트 해석에 대해 반기를 들고는 모차르트가 살았던 그 시대의 방식 그대로 모차르트를 해석하고 것을 핵심으로 한 정격연주 사조를 이끌어나가는 아르농쿠르는 모차르트의 낭만주의적 성격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것이 모차르트의 진면목을 살핀다는 점에서 정격연주의 맥락에 부합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모차르트가 그의 음악 안으로 쏟아 부은 것을 드러내 보여 주고 싶다. 저 심연의 삶부터 천국의 삶까지 말이다. 내가 젊은 시절 ‘g단조 교향곡’을 연주했을 때, 사람들은 웃었고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음악에 담긴 빛과 그림자, 행과 불행, 아름다움과 추함 등 한없이 깊게 거울로 비추듯 보여 주고 싶었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모차르트 교향곡 제40번이 자신의 음악세계에 대한 운명을 바꾼 곡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50년 전에 오케스트라의 단원일 때, 저는 일 년에 몇 차례 모차르트의 G단조 교향곡을 연주해야 했는데 그것은 항상 부드럽고 아름다웠습니다. 청중들은 행복에 젖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고 곡이 끝나면 '모차르트 행복감'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제 책상 위의 진실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멜로디, 화음, 그리고 리듬,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정말로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미뉴에트 악장의 '로맨틱한 트리오'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마도 2차대전 후라는 시대 상황에서 사람들이 가장 극명하게 정반대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현란한 하모니와 순수한 행복감은 필요로 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모차르트 음악에 관한 해석이 다소 밝고 긍정적인 면은 강조하고 파괴적인 면은 억압하는 양상이었습니다. 이 교향곡은 개인적으로 저의 '운명 교향곡'이 되었고 제 인생을 영구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로 17년을 지낸 어느 날, 저는 더 이상 그 곡을 그런 식으로 다시는 연주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오케스트라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 교향곡은 많은 문학작품이나 공예품과 똑같이 위대한 본보기가 됩니다. 예술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가? 또 청중은 무엇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가? 모차르트는 계속 이 한계에 매우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아래 글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기념 축제의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축하 연설이다. 아르농쿠르는 빈 필하모닉과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40번을 연주하기에 앞서 자신이 왜 모차르트에 평생을 바쳐야 했는지, 모차르트의 음악이 가지는 시대적인 역할과 속속들이 드러난 모차르트 음악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연주자들이 모차르트를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또한 오늘날 위기에 처한 음악교육과 상업주의에 물든 모차르트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을 가해 장내를 숙연하게 했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기념 축제에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축하 연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교향곡이야말로 이 축제의 진정한 서막이라 여깁니다. 이제 연주하게 될 교향곡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세 개의 마지막 교향곡(39, 40, 41번) 중에서 가운데 곡입니다. 분명 이 세 개의 교향곡은 인간이 목적지로 가기 위해 택한 일종의 길을 나타냅니다. 이 마지막 세 교향곡의 첫 곡은 E플랫장조인데, 이것은 사랑의 조성이며 동시에 '의례적 장중함'의 조성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시작해 모차르트는 G단조 교향곡으로 넘어가 앞선 모든 것이 의심되는 깊이 있는 단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리고 '주피터' 교향곡의 현란한 C장조로 이어지는데, 이 곡에서는 모든 것이 해결되고 전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사람들이 하모니 속에 평온함을 느끼게 합니다. 모차르트는 41개의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G단조는 25번 교향곡과 함께 두 곡밖에 없습니다. 당시에는 G단조가 죽음과 슬픔의 조성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한숨의 동기'가 나오는 첫 주제 악장에서는 단 한 개의 음도 바로 연주되지 않습니다. 모든 음은 위에서 아래로, 또는 그 반대로 연결되는 자식음인 '아포지아투라(appoggiatura)'를 갖고 있어서 매우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 흐릿해집니다. 마치 물방울을 통해 보는 것처럼 불명료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악장은 '주피터' 교향곡에서 살짝 숨겨져 있기도 한 푸가 주제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E플랫 장조인데 마치 첫 번째 악장의 악몽을 완전히 없애려는 듯,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을 호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언어가 무색해지고 우리가 그 앞에서 잠잠해져야 하는 이 놀라운 음악을 들으신 후에 저는 이제 모차르트와 그를 기념하는 올 한해에 대해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아니, 어떤 축하연설도 이 음악에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제가 모차르트의 음악 외에 다른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인데, 이제는 모두가 음악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 오스트리아는 모차르트와 동일한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차르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돈을 벌고 사업과 관련된 것이어서 유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모차르트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고 지난 200년이 넘게 우리에게 요구해온 바는 너무나 단순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엄숙히 그리고 주의 깊게 그의 음악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의 말없는 간청과 호소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쭐해 하기보다는 진실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를 축하하고 있는데 그것이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축하하고 싶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차르트가 빈과 잘츠부르크에서 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천재의 가차없는 엄격함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데, 우리는 경제적 증대 효과와 사업상의 거래로 그를 축하하고 그의 음악을 모든 종류의 경영 채널을 통해 조각조각으로 흩어 보내고 있습니다. 추악하며 수치스러운 것이죠. 어떻게 그것이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반성의 한 해가 의미를 가지려면 우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모차르트가 전하는 메세지의 일부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우리의 시상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그의 격도하며 요동치는 폭풍을 갈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한 해는 실로 우리를 위한 기회인 것입니다. 모차르트가 이룬 성과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술 자체입니다. 그것은 음악이고 우리는 그 음악을 통해 이뤄온 것과 지금도 이루어 가고 있는 것, 또 이루지 못한 것을 설명해야 합니다. 음악과 예술은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실용적인 것과 균형을 맞추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예술이며 음악이라고 말할 때 저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매혹적인 선물이며 마법의 언어입니다. 현 세대들은 행복의 기대치가 물질적인 것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당장 쓸모 있는 것에만 점점 집중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성공과 동일하고, 성공은 재산과 같다. 나는 더 많이 소유할수록 더 잘 살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이미 학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술 과목들, 상상력에 도전하는 모든 것들과 인간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 혹자는 '필수불가결하게 되고 싶은' 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 대부분의 것들이 억압받고 있습니다. 요즘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노래를 하도록 권유받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노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노래해야 할지 모르고, 아예 아는 노래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이해하는 것은 이미 3, 4, 5세 때 시작됩니다. 이후에는 이것이 방송이나 워크맨에 맡겨지게 됩니다. 만일 예술 교육이 독서, 쓰기, 그리고 수학과 동일한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실용주의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면, 물질주의와 탐욕이 우리 시대의 맹목적 종교가 될 극도의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단순한 기술훈련이 아니라 완전한 교육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음을 다급하게 경고합니다! '피사 연구(Pisa Study)'처럼, 음악을 다소 경시하는 경향이 우리의 교육 목표가 잘못 설정되었다는 증후입니다. 저는 예술에 대한 관심이 상류층에서 확교하게 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장 고급화된 형태의 예술은 아무도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없을 때 결국 공허한 외침이 되리라는 것이 진실입니다. 음악은 교만하고 자기만족적이며 특권을 갖고 있는 소수만의 신비한 언어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그 메세지를 이해할 수 있고,어린 나이부터 안테나가 바르게 맞추어졌다면 그 부유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술의 보이지 않는 힘은 강력하고 위험스러우며, 그 효과는 파괴적입니다. 그런 이유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것을 활용하려 애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술은 언제나 권력에 반대하고 그 어떤 지배도 받지 않으며, 길들여질 수도 전유될 수도 없기에 그들의 시도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예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이지만 말의 언어보다도 진리에 더 가깝습니다. 위대한 작곡가들의 음악은 항상 그 시대의 영적 상황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해왔습니다. 모차르트의 G단조 교향곡이 처음 연주되었을 때 사람들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음악 어법이 허용될지에 대해 반신반의했습니다. 그 때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이 교향곡이 극단적인 음악 언어의 형태라고 느꼈습니다. 아무도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술은 어떤 깨달음에 이르도록 인도하며 때로는 강제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아야만 하는 거울입니다. 거울은 보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예술을 단지 미학적이거나 대중적인 어떤 것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취합니다. '듣기 좋은' 음악을 듣고, '보기 좋은' 그림을 보면서 되도록이면 파괴적인 경험에 노출되거나 철저하게 분쇄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게 됩니다. 50년 전에 오케스트라의 단원일 때, 저는 일 년에 몇 차례 모차르트의 G단조 교향곡을 연주해야 했는데 그것은 항상 부드럽고 아름다웠습니다. 청중들은 행복에 젖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고 곡이 끝나면 '모차르트 행복감'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제 책상 위의 진실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멜로디, 화음, 그리고 리듬,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정말로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미뉴에트 악장의 '로맨틱한 트리오'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마도 2차대전 후라는 시대 상황에서 사람들이 가장 극명하게 정반대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현란한 하모니와 순수한 행복감은 필요로 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모차르트 음악에 관한 해석이 다소 밝고 긍정적인 면은 강조하고 파괴적인 면은 억압하는 양상이었습니다. 이 교향곡은 개인적으로 저의 '운명 교향곡'(제 개인의 운명에 관한 교향곡)이 되었고 제 인생을 영구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로 17년을 지낸 어느 날, 저는 더 이상 그 곡을 그런 식으로 다시는 연주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오케스트라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 교향곡은 많은 문학작품이나 공예품과 똑같이 위대한 본보기가 됩니다. 예술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가? 또 청중은 무엇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가? 모차르트는 계속 이 한계에 매우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모차르트는 인간으로서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정말 불가사의합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인생은 서류상으로 매우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결코 모차르트에 관한 진실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입니다. 그의 음악만이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인물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이중적 견해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두 명의 모차르트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아이, 활달하고 외향적인 젊은이, 모차르트의 친구들은 그가 결코 우울해 한 적이 없으며 젊어서부터 세련된 필체로 편지를 쓴, 교양 있고 재치 넘치며 자기 확신에 찬 인물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전기를 통해 아는 경제적, 예술적 위기를 겪고 가정사에 문제를 안고 있는 모차르트, 그는 부자였을까요, 가난했을까요? 그는 아버지와 다투었을까요, 아니면 그 관계가 조화로운 사랑의 관계였을까요? 빈에서 초연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성공하지 못하자 모차르트는 예술가로서 실패했을까요?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한 마디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스바르트 스팬글러(Osward Spengler)가 말햇듯이 "자연은 과학적으로 다루어져야 하지만, 역사에 대해서는 시를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모차르트는 진실한 바로 그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생각을 넘어서며 어떤 평가를 내리기가 불가능한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의 척도가 모차르트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모차르트는 다른 행성에서 온 것같습니다. 오직 자신의 음악을 통해 살고 있습니다. 매순간 심각하고 농담을 하고 있을 때조차도 숨 막힐 듯 답답합니다. '음악적 농담(the Musikalischer Spass)'도 오페라 '짜이데(Zaide)'에서 나오는 '유령과 같은 분위기의 웃긴 아리아'처럼 어둡습니다. 아버지가 어린 모차르트에게 천재성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가족에게 틀림없이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유쾌하고 총명한 어린 아이를 대면하고 그가 악어와도 같이 무시무시한 존재임을 발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는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떨어지는 유성과 같습니다. 연주하는 어린 아이가 어른이었던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는 천재를 양육하는 모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악마적 존재는 그의 환경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는 '양육될' 수 없고 가족에게 사랑받는 존재임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욉니다. 아주 초기 작품에서 예술가로서 모차르트의 길은 외부환경과는 정반대로 절대적으로 확고하며 놀라운 확신으로 특징지어 집니다. 심지어 아이일 때도 모차르트는 정서적으로 경험하거나 겪을 수 있었던 범위를 넘어서는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젊은 청년으로 남아 있고 또 언제나 젊은이였던 모차르트에게 사랑과 죽음, 비극과 죄, 그리고 행복에 관한 가장 극단의 비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우리로 하여금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하고, 그 다음 하늘을 올려다보게 합니다. 아마도 그는 신의 손에 들린 펜대였을 것입니다. 글 출처: 내 생각이 싹트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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