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르자크 [Antonín Dvorák 1841∼1904]
체코의 작곡가. 17세 때 프라하의 오르간학교에 들어가 2년간 공부하고 졸업 후 레스토랑·호텔 등에서 비올라를 켜오다가 1862년 프라하에 가설극장(假設劇場 : 훗날의 국민극장)이 신설되자 그곳 비올라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66년 그곳 지휘자로 취임한 B.스메타나의 영향을 받아, 당시 고조된 민족운동의 와중에서 음악가로서 체코의 민족문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해부터 오스트리아 정부의 장학금을 얻기 위해 매년 작품을 제출하던 중 77년 심사원이던 J.브람스에게 인정되어 베를린의 출판사에서 작품이 출판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이때부터 여러 연주자가 그의 실내악이나 관현악곡을 베를린·런던에서도 연주하게 되어, 그의 명성은 국내외로 퍼졌으며 78년부터 지휘를 시작하여 84년 이후 영국을 9회나 방문하여 자작곡을 지휘, 대환영을 받았습니다.
91년 프라하음악원 교수가 되고, 같은 해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92년에는 뉴욕의 내셔널음악원 원장으로 초빙 되어 도미했고, 다음해 미국에서의 신선한 인상을 소재로 교향곡 9번 《신세계:From the New World》를 작곡했습니다. 95년 4월 프라하로 돌아온 후 72년 애국적인 시 《백산(白山)의 후계자들》에 의한 합창 찬가가 호평을 받음으로써 인정을 받고, 74년에는 성아달베르트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그후 음악원의 작곡 교수직과 창작에 전념하여, 1901년 프라하음악원 원장이 되고, 오스트리아 상원의원에 임명되는 등 음악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으나, 1904년 신장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드보르자크는 2년간 오르간학교에서 공부한 이외에는 거의 독학으로 베토벤, 슈베르트를 연구하였습니다. 표제음악 전성기에 절대음악(絶對音樂)을 많이 작곡한 그는 브람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미국에서 귀국한 다음에는 교향시와 오페라 이외의 것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미국 체류중에는 니그로나 아메리칸 인디언 음악에 흥미를 느껴 그 요소를 곁들인 작품을 썼으며, 이런 작품이 그의 대표작처럼 되었으나, 미국 체류시대 이외의 것도 재인식되었습니다.
글출처: 웹사이트 / 음원출처: http://usoc.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