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곡들이 작곡된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작품 10은 1829년에서 36년 사이에, 작품 25는 1832년에서 36년 사이에 작곡되었다고 하는데, 작품 10은 프란쯔 리스트에게, 작품 25는 그 당시 문학계에서 이름을 날린 다글 백작부인에게 헌정된 것이다. 이 연습곡을 쓸 때 쇼팽은 파가니니의 영향으로 음악의 화려한 연주기교와 시적 표현의 융해를 꾀하였다. 그래서 당대의 보수주의적 정신에 의해 "예술의 파괴"라고 비난 받았으나, 슈만과 리스트에게는 환영 받았다. 한편 피아노 음악의 영역에 있어서는 조성을 최대로 확장시켜 새로운 수법으로 핑거링 테그닉에 혁명을 일으켰다. 이 곡들은 연습곡으로서 교육적 목적도 성취했으며 낭만파 피아노 음악의 모든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연습곡이란 원래 연주기술을 연마하기 위해서 쓰여진 악곡입니다만 쇼팽의 곡은 예술적인 요소도 지니고 있습니다. 20세의 청년 쇼팽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중에 "나는 나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의 연습곡을 작곡해 봤다"라고 썼습니다. 자신의 독특한 방법이란 그의 연습곡을 일관하는 특징인 것입니다. 이는 연주회를 위한 예술적인 작품으로 기교를 연마하는 단순한 연습곡이 아닙니다. 곡 하나하나가 기교상의 과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만 과거의 연습곡이 갖지못햇던 정서와 시성을 갖게 한 것입니다.
Etudes op.10 작품해설
No.1 in C major
4/4 박자의 알레그로. 이 곡은 아르페지오를 위한 연습곡이라 할 수 있다. 왼손은 무게가있는 옥타브 선율을 치고, 오른 손은 시종 아르페지오로 화려하게 오르내리는, 마치 파도가 밀려오고 가는 것 같은 장대한 작품이다. 오른손이 너무 화려해서 왼손의 의미는 연주자나 감상자가 간과하기 쉬우나,한 연주자들은 이 왼손 저음부를 끊어지지 않게 그리고 힘차게 연주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감전, 영웅적인 표정으로 웅혼하게 펼쳐지기 때문에 흔히 바다에 비유되어 '대양'이란 부제를 붙이기도 한다. 왼손은 옥타브로 무게 있는 선율을 연주하고 오른손은 아르페지오를 화려하게 연주한다. 이 곡은 정서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기교적인 것이라 하겠는데, 특히 고성의 기초가 되고 있는 화성을 파악하지 않는 한 의미가 없어진다.
No.2 in A minor
4/4 박자의 알레그로. 손가락 분리연습을 위한 반음계 연습곡으로, 기교적으로 상당히 어렵다. 이곡 연주의 성패는 흔히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어려운 셋째, 넷쩨, 다섯째 손가락이 얼마나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달려있다. 기교적으로도 매우 어렵지만, 저변에 깔린 감성은 대단히 음울하고, 침통한 표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정서까지도 신중히 고려하면서 연주 혹은 감상해야 한다.
No.3 in E major 'Tristesse'
2/4 박자의 렌토. 이 곡은 일명 "이별의 곡"으로도 불리워지고 있는데 잔잔하고 애수가 깃든 아름다운 선율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별의 곡'으로 알려진 명곡으로 쇼팽 자신이 당시 한 제자에게 "이제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을 써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 오지만, 선율은 정말 천상의 것이며, 그대로 선율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로맨틱하기 때문에 감정에 탐닉하기 쉽지만, 너무 처지지 않는 렌토를 꼭 지켜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루바토 사용에 더욱 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피아니스트가 정서 표현력을 기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연습곡이다.
No.4 in C# minor
4/4 박자 프레스토. 전형적인 기교 연습곡인데 기교상만 으로만 본다면 연습?중에서 가장 어려운 작품에 속한다. 끝없이 헤집고 다니는 '무궁동'이라 할 수 있는데, 대단히 빠른 손가락의 움직임과 탄력이 필요하며, 특히 손가락의 움직임과 탄력이 필요하며, 특히 손가락이 모아졌다 펼쳐졌다 하는 과정에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흔히 잘 치지 못하는 연주자들의 경우, 이곡을 재빨리 쳐내려 하는 욕심 때문에 악상기호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물론 쇼팽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No.5 in Gb major 'Black Keys'
2/4 박자 비바체로 '검은 건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왼손으로는 흰 건반을 치며 조성을 가다듬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빠른 음형이 오른손의 검은 건반으로 연주되는 곡. 검은 건반에서 손가락의 움직임을 원할히 하기 위한 연습곡으로 쇼팽 자신도 이 작품에 대해서는 기교 이상의 의미를 달고 있지 않다. 검은 건반 연습곡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No.6 in Eb minor
6/8 박자의 안단테. 매우 어둡고 고독한 정경을 연출하는 녹턴 풍의 연습곡이라 할 수 있다. 오른 손의 구슬픈 멜로디는 감정의 흐름을 잘 읽으며 세심하게 처리되어야 하지만, 왼손의 반주부에도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반주부는 시종 16음부의 음형이 동일하게 이루어지며,음들 간의 단절 없이 부드럽게 노래하는 레가토 주법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침통하기까지 한 하나의 '비가'라고 할 수 있는데 , 제 3번 <이별의 곡> 연습곡처럼 연주자의 정서적 표현력을 기르는 데 대단히 중요한 곡이다.
No.7 in C major
6/8 박자의 비바체이다. 토카타 풍의 연습곡으로 악상은 화려하고 밝다. 앞의 6번 곡과는 정서적인 측면도 그렇지만, 기교상으로도 전혀 다르다. 앞의 곡이 레가토로 건반을 꼭꼭 짚으며 깊은 소리를 내야 했다면, 이 곡에서는 중음을 가볍고 부드럽게 , 그리고 재빠르게 옮겨가야 한다. 저음부는 스타카토로 처리되지만 이곳에도 귀한 선율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No.8 in F major
4/4 박자 알레그로. 전체 중에서 가장 유창하고 경쾌한 곡에 속한다. 흔히 '말이 하늘을 날으 듯' 한다고 표현하는데 그만큼 넓은 음역을 쓰며 각양각색의 음형, 분산화음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No.9 in F minor
6/8 의 알레그로 이지만 결코 밝은 정서는 아니다. 오른 손은 병마에 시달리던 쇼팽의 황량한 만년을 읊조리듯 다소 쓸쓸하면서도 절규하는 모습의 격정적인 음악이다. 특히 맨 마지막에는 모든 절규가 한숨으로 사라지기 직전 야릇한 분위기를 살려야 한다.
오른 손은 매우 선율적인 음형이지만, 스타카토로 연주하고 있는 것이 더욱 병적인 정신상태를 보여준다. 템포와 뒤나믹을 적절히 처리하여 쇼팽이 의도한 내면적 정서를 고스란히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No.10 in Ab major
12/8 박자의 비바체로 손목의 유연성이 특별히 요구되는 음악이다. 엑센트와 리듬에 역점을 두고 창작된 작품인데, 오른손의 우아한 멜로디가 왼손의 화성과 교차하며 빚어내는 음향효과를 절묘하게 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상 그 야릇한 환상의 음향을 제대로 이끌어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 연습곡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장 높은 위치에 도달한 피아니스트"라고 한 한스 폰 뷜로의 말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No.11 in Eb major
3/4 알레그레토. 아르페지오의 우아한 선율이 끌어내는 환상적인 표현이 일품이다. 양손이 모두 한 옥타브를 넘는 화음을 아르페지오로 연주해서 손가락의 범위를 확장시키려는 목적으로 작곡된 것이다
No.12 in C minor 'Revolutionary'
"혁명"의 연습곡으로 알려져 있다. 쇼팽이 고국 폴란드에서 파리로 떠나는 도중 슈투트가르트에서 바르샤바가 러시아군에게 침공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한 슬픔에 잠겨 작곡하였다는 곡이다. 기술상 이것은 왼손을 위한 연습곡으로 특히 힘을 절약하는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격동적인 왼손의 흐름에 오른손은 거친 옥타브로서 강렬한 선율이 노래된다.
기술적으로는 왼손의 움직임을 위한 연습곡이지만 이 곡에 담긴 통절한 심정은 연습곡이라기 보다는 한편의 음시(音詩)라고 하겠다. 그래서 단독으로 많이 연주된다. 12편의연습곡을 끝내기에 알맞은 격정에 넘치는 장대한 곡이다. 그러나 미디 파일로 듣기에는좀 미흡하다. 장대한 맛을 별로 느낄 수 없으니 원곡을 들어야 할 것 같다.짝사랑의 아픈상처를 안고 자신이 다시는 조국 폴란드의 땅을 밟지 못할 신세라는 사실도 모르는 채 바르샤바를 떠난 쇼팽은 음악의 도시라는 빈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마침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손을 잡은 때라서 러시아에서 독립하려는 폴란드 국민인 쇼팽은 빈에서 적국 사람의 취급을 받았다. 이에 그곳을 떠나 영국으로 가려던 그는 도중에 들른 독일의 슈트드가르 트에서 러시아가 조국 폴란드를 다시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때는 1831년, 그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글로 남겼다.
"가엾은 아버지, 어머니 굶주리고 계시겠지.
누이와 동생은 여린 몸을 러시아 군인에게 짓밟혔을까.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구나. 괴로워라.
오로지 절망을 피아노에 쏟을 뿐이다."
그는 피아노를 때려 부술듯이 곡들을 써 내려갔고, 그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그대로 담긴곡이 오늘날 ≪혁명≫으로 알려져 있는 ≪연습곡 다단조 작품 10의 12≫이다. 이 곡에서는 쇼팽의 나라 잃은 분노와 타국에서의 외로움이 격렬하게 느껴져 온다. 알레그로 콘푸오고, 4/4박자의 세 도막 형식의 구성을 가지고 있는 이 곡은 연주할 때 무엇보다도 악센트와 힘을 필요로 하는 피아노 연습곡이다. 자신은 프랑스인 이었지만 아내와 아내의 조국 폴란드를 사랑하는 마음에 폴란드 독립을 위해 혁명군 장교로 전쟁에까지 나섰던 쇼팽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준 애국심은 평생 쇼팽을 괴롭히고 절망의 늪에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애국심이 또한 그에게 평생동안 위대한 음악을 쓰게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영국을 향했던 쇼팽의 발걸음은 결국 아버지의 조국 프랑스로 옮겨졌고, 은컵에 담은 한줌의 폴란드 흙을 소중히 지닌 채 그는 파리로 들어섰다. 그리고 쇼팽이 평생 지니고 다녔던 그 흙은 결국 그가 파리의 한 묘지에 쓸쓸히 묻힐 때 그의 무덤 위에 뿌려졌다. 이 곡을 들으면서 아직도 그의 묘지에는향과 꽃이 끊이지 않고, 눈물을 흘리는 여성들의 발걸음으로 붐비고 있다는 사실이 쇼팽에게 사후에라도 행복감과 만족감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머레이 페라이어 (Murray Perahia)
30여 년 이상을 무대 위 연주자로서 살아 온 머레이 페라이어는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의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전세계 주요 콘서트 홀을 무대로, 또한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연주해왔다.
그는 현재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의 상임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휘와 협연을 맡아 그간 미국과 유럽, 일본, 동아시아에서 연주회를 가졌다.최근에 그는 그의 야심찬 프로젝트인 헨레 원전 악보를 사용하여 베토벤 소나타 전곡 편집을 착수하였다.
2003/04 시즌에 그의 연주 일정으로는 북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와 함께 연주할 것이고, 또한 카메라타 잘츠부르크, 그리고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와 유럽 순회 연주가 포함되어 있다.
페라이어는 아주 폭넓고 다양한 디스코그래피를 자랑한다. 가장 최근에 그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만년 작품, "소나타 D.958, 959, 960"을 녹음하였다. 그의 쇼팽 "에튜드 Op.10"과 "Op.25 전집" 은 2003년 그래미상 베스트 솔로 기악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바흐 작품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연구의 결과로 그는 최근 바흐의 건반 협주곡 집을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와 함께 발매하였다. 그의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두번이나 그래미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2001년 그라모폰 상의 "베스트 기악 음반상"을 수상하였다. 이 음반은 15주 동안이나 빌보드 클래식 부분 TOP10에 랭크 되기도 하였다.
1999년에 그는 그의 음반 바흐의 영국 모음곡집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하였고, 1995년과 1997년에는 쇼팽 발라드와 헨델과 스카를라티 음반으로 그라모폰지의 음반상을 수상하였다. 1998년에는 그가 전속으로 있는 소니 음반사에서 25년 전속을 기념하는 4장짜리 기념 음반을 발매하기도 하였다.
뉴욕에서 태어난 페라이어는 그의 나의 4세 때 처음 피아노를 시작하여 후에 매네스 음대에서 작곡과 지휘를 전공하였다. 그 시절 그는 루돌프 서킨과 파블로 카잘스, 그리고 부다페스트 현악 사중주단과 교류하며 대부분의 여름을 말보로에서 보냈다. 또한 그는 미에치슬라프 호르초프스키를 사사하기도 하였다.그는 그에게 지대한 음악적 영감을 안겨 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깊은 친분을 쌓으며 그의 음악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1972년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페라이어는 1973년 알데버그 페스티벌에서 그의 첫 연주를 시작하였고 이곳에서 벤자민 브리튼과 테너 피터 피어스와 함께 작업하였다. 그 인연으로 1981년부터 1989년에 걸쳐 여러 차례 피어스의 가곡 리사이틀 때 함께 하였으며, 알데버그 페스티벌의 공동 예술감독을 지냈다. 머레이 페라이어는 왕립 음악학교와 왕립 아카데미 오브 뮤직의 명예회원이며, 최근에는 리즈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글출처: 웹사이트 / 음원출처: 향기로운 삶의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