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림운동

[스크랩] 김철의 `몸살림 이야기`〈30〉 몸과 마음의 관계 4

로만짜 2008. 5. 17. 16:01
두뇌가 생각의 원천
  
  영장류가 진화하면서 점점 더 직립을 하게 되는데, 직립을 완성한 것은 인류의 단계에 와서이다. 직립을 완성했다는 것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네 발 중 앞의 두 발의 예전의 '의무'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발이 손이 된 것이다. 발일 때에는 발로서만, 즉 서고 걷고 뛰는 데만 사용되었는데, 손이 되니까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완전하게 직립을 이루지 못한 침팬지가 맛있는 개미를 잡아먹기 위해 나뭇가지를 개미구멍 속으로 집어넣었다가 빼는 장면을 많이 보았을 텐데, 이것은 조금 발에서 벗어난 손이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완전하게 직립을 하면서 도구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직립과 관련해서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직립을 하면서 인간의 허리가 약해졌다는 속설이다. 허리가 아픈 사람들은 너무나 많아지고 있는데, 그러나 허리가 왜 아프게 되는지 근본적인 이유는 모르고 있고, 따라서 허리의 통증을 근본적으로 사라지게 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해결을 하지 못할 때 원인을 유전으로 돌리고 진화의 과정에 핑계를 대게 된다. 인간의 허리는 진화의 과정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문명 생활을 하면서 고관절에 문제가 생길 여지가 커졌다는 것일 뿐이다. 허리의 통증만이 아니라 90% 이상의 병은 이것 때문에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허리는 고관절이 바른 상태에 있다면 2톤 정도의 무게에도 견딜 수 있게 돼 있는 것이다.
  
  어쨌든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손을 놀리거나 도구를 이용하는 방법도 급격하게 늘어나고, 이에 따라 두뇌의 용량 역시 급격하게 늘어난다. 우리의 두뇌에는 각 손가락을 관장하는 부분이 각기 따로 있을 만큼 손은 우리 몸에서도 아주 오묘한 존재이다. 이 세상에서 쇠젓가락으로 마른 콩알을 집을 수 있는 것은 한국인뿐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손놀림이 좋은 민족은 손재주만 좋은 것이 아니라 머리 또한 좋을 수밖에 없다.
  
  두뇌가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가장 기본적인 현상 중의 하나가 더 많이, 더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기억'은, 문명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의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어쨌든 인간이 문명을 형성하게 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된다. 물고기는 자신이 낚싯바늘을 물었다는 사실을 0.4초밖에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사람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이런 호된 경험을 했더라면 평생 잊어버리지 못하고 기억하고 꿈에도 나타날 것이다. 물고기처럼 이렇게 기억하는 시간이 짧으면 경험을 형성할 수 없게 된다.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되면 기억한 것 중에서 똑같은 것과 다른 것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구별'이 가능해지면서 '개념'이 생겨나게 된다. 하나의 '말'로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 다르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물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험'까지도 개념화시킬 수 있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은 더 쌓이게 되고, 경험이 더 쌓이면서 더 정확하게 사물과 자신의 경험을 개념화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눈'을 표현할 때 우리는 산에 쌓여 있는 눈이든 내리고 있는 눈이든 모두 눈이라고 표현하지만, 원시적인 부족은 두 가지 눈에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인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원시 부족을 야만인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원시의 상태에서 살던 사람이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여 살다가 주말만 되면 야외로 나가 자연을 느껴 보려고 하는, 그래서 주말만 되면 고속도로가 꽉꽉 막혀 또 스트레스를 받는 현대인보다 더 행복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명이 자연의 산물이고 자연적 존재인 인간을 숨 막히게 하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인류가 자신의 삶의 방법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정확하게 방향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쨌든 개념화가 이루어지면 생각도 개념을 통해서 하게 된다. 개념을 통해서 생각을 하게 되면 사고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지게 된다. 하나하나의 사물이나 하나하나의 경험을 일일이 체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개념을 엄밀하게 정의하고 나면, 개념과 개념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고의 폭이 넓어지면서 이 세계 전체를 이해하려고 하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이해한 세계에 대해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행동을 하게 된다. 자연에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데서 벗어나 점차 생각을 해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개념 없이는 사고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완전히 틀린 이야기이다. 개념적 사고는 개념을 통해서만 이루어지지만, 비개념적 사고는 개념을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 생각을 개념적으로만 할 수 있다고 보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이번 점심에는 '청국장'이 먹고 싶다고 할 때, 그것도 일종의 생각이다. 이는 우리 몸에서 청국장을 원하고 있는 것이고, 원하는 바가 청국장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생각에는 이렇게 단순한 것에서부터 서양철학처럼 복잡한 개념적 틀을 사용하는 것까지 다양한 것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고 한 프로이트의 생각은 맞는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의식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대부분 몸에서 욕구하고 있는 것, 즉 무의식의 세계에서 원하는 것을 두뇌에서 개념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는 것은 우리 몸이 바라는 것을 두뇌가 용역을 받아서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뇌가 수동적인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바라는 것은 몸이지만, 판단하는 것은 두뇌이다. 우리는 매 순간 판단을 해야 한다. 이미 문명을 형성한 인간은 두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인간은 두뇌의 판단에 더욱더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컨대 지난 20세기는 이데올로기의 시대, 즉 이데올로기가 지배한 시대였다고 하는데, 이데올로기는 두뇌가 만들어 놓은 개념의 집합체일 뿐이다. 개념, 즉 두뇌의 산물이 인간의 몸, 바로 생명을 지배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21세기의 화두가 생명이 되는 것은 사람들이 두뇌의 산물에 빠져 생명을 경시했다는 반성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두뇌의 산물인 지식은 사람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때문에 바른 지식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바른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귀중한 생명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생명을 중심으로 지식이 구축되어야 한다. 돈이 아니라 생명을 중심으로 지식도 구축하고 사회도 바꾸어 나가야 한다.
  
  무한한 욕심은 문명의 산물
  
  지금도 파푸아뉴기니의 원시인들이 사는 것을 보면 참으로 소박하다. 식물도 먹을 만큼만 채취하고 동물도 먹을 만큼만 잡아서 먹는다. 무한하게 소유하려고 하는 소위 문명사회의 사람들과는 천양지차를 보인다. 이런 사람들에게 모든 것은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면서 그 의미를 설명해 주어 보아야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먹고살면 되지 무엇 하러 경쟁을 해서 무한히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지,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 신이 노할 것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이들은 실제로 너무 많이 잡으면 신이 노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자연과 공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진화의 과정에서 갓 인간이 되었을 때 인간은 그야말로 자연적 존재였다. 파푸아뉴기니의 원시인들처럼 특별한 욕심 없이 자연에 순응하면서 순리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됐다. 물론 인간도 먹어야 사는 존재이니까 영역을 두고 다투기도 했을 것이고, 또 한 씨족 내에서 권력을 놓고 조금씩 다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툼은 죽기 살기로 하는 다툼은 아니었다. 아직 사람을 죽이는 무기는 발달해 있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자연이 주는 먹이를 먹고사는 여느 영장류와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생활은 농경이든 목축이든 인공으로 자연을 가공해서 먹고살게 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농경을 하든 목축을 하든 자연의 가공물을 비축하게 되었고, 비축한 가공물을 두고 서로 먹겠다고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자연에서 벗어나면서 견물생심(見物生心)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부족 내에서 더 먹겠다고 다투고, 다른 부족의 것을 빼앗으려고 부족끼리 다투었다. 특히 철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단번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도 만들어서 사용하게 되었다. 이제는 자연을 가공하기 위해 사람을 붙잡아다가 노예로 부려먹기까지 하게 되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전쟁의 시대가 개막됐다. 상대를 정복해서 빼앗아먹으려는 욕심은 점점 더 커져 갔다. 무한한 욕심이 무한한 정복전쟁을 통해 '제국'(帝國)을 형성하게 했다. 싸움은 이길 것을 요구하므로, 싸우는 사람들은 이기기 위해 무기와 전술을 개발한다. 칼과 창과 활을 쓰던 시대에서 총과 대포를 쓰는 시대로, 그리고 이제는 인류를 멸망시킬 핵폭탄을 미사일로 쏘는 시대로 바뀌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싸고 싶을 때 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연적 순리이다. 자연계에서 모든 생명은 이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고 있다. 인간도 자연이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라도 먹고 자고 싸고 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일지라도 이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욕심이라고 할 수 없다. 자연스러운 욕구인 것이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무한하게 추구하게 되었을 때, 이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줄 뿐 아니라 인류가 살아가야 할 터전인 자연도 망가뜨리게 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 광분하게 될 때 이것이 바로 욕심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에게 비관적인 미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생각이 있는 존재이고, 생각을 잘하면 미래도 잘 가꿀 수 있을 것이다. 욕심이라는 것은 일정한 문명의 시대에 사람의 생각이 그러한 방향으로 몰렸을 때 활활 타오르는 불길과 같이 일어났던 것일 뿐이다. 사람에게는 욕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배려하고 나누려고 하는 마음도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면 미래는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김철/몸살림운동가
출처 : 몸살림운동 부산동호회
글쓴이 : 공구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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