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쇼팽 / Polonaise-Fantasie,op.61 - Vladimir Horowitz

로만짜 2007. 11. 15. 06:55
 
 

 

 

Horowitz in London

RCA Victor: 09026 61414 2

 

Anonymous
1. God Save the Queen

Frederic Chopin
2. Polonaise-Fantaisie, Op.61
3. Ballade No.1 in G minor, Op.23

Robert Schumann
4-16. Kinderszenen, Op.15

Alexander Scriabin
17. Etude in D-sharp minor, Op.8 No.12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Vladimir Horowitz, 1904-1989)라는 피아니스트가 20세기의 수 많은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고 그 위치는 어느 정도일까? 굉장히 극단적이고 편협한 비교가 되겠지만 음악가, 연주자로서의 호로비츠는 결코 리히터나 제르킨에 견줄만한 인물은 못 된다. 연주자로서 성장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미국 청중들을 열광시켰던 호로비츠의 음악에는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게, 또 어느 정도는 고의적으로, 당시 만연하고 있었던 천박한 미국식 상업주의의 영향이 깃들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으며 이후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입김까지 호로비츠의 음악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전쟁 중, 혼란스러웠던 유럽대륙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호로비츠의 행운이었다면, 평생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펼쳤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호로비츠의 불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호로비츠에 대한 찬사의 이면에는 항상 개운치 않은 그림자가 따라 다녔고, 유명한 평론가인 마이클 션버그는 '악기에 대한 놀라운 재능이 음악적 이해와 항상 같이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혹은 전해듣고 있는 그에 관한 무수한 전설들은 얼마나 과 대평가된 것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호로비츠는 상업주의로 포장된 허상일 수도 있다는 것일까? - 필자는 호로비츠가 필요 이상으로 과대평가 되었다는 의견에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모습이 왜곡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호로비츠는 그 자체로서 극히 카리스마적인 존재였고 청중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조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 었으므로, 음악을 통하여 자신이 가진 그대로를 고스란히 보여주었을 뿐, 자신의 음악이 상업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숨기려 하지 않았었다. 1930년대의 청중들에게는 거의 상상도 하기 힘든 정도임에 틀림없었던 놀라운 손가락 기교에 피아노 전체가 진동하는 듯 한 큰 음량, 여리고 서정적인 부분에서 흘러 나오는 티 없이 맑은 소리 등등 그에게는 청중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완전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당시 자본주의의 첨병이었던 미국사회에서 호로비츠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호로비츠의 생애와 음악

 

호로비츠는 1904년 10월 1일 이래저래 음악과는 관련이 깊은 우크라이나의 키에프에서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래의 이름은 호로비츠가 아니라 고로비츠(Gorowitz)였으며 1925년 베를린 데뷔시에 이름을 바꾸게 된다. 집안은 안정되고 부유했으며 가족들은 매우 지적인 사람들이어서 집안에 매우 많은 고전서적들이 갖추어져있어 어린 시절 호로비츠는 이들 서적을 탐독했다고 한다. 호로비츠가 피아노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07년 어머니인 세르게이 타로노프스키로부터였다. 호로비츠의 삼촌 또한 당시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음악학자였는데, 스크리아빈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어린 호로비츠와 스크리아빈을 만나게 하였으며 이 때의 인연으로 호로비츠는 평생에 걸쳐 스크리아빈의 음악을 즐겨 연주하게 되었으며, 사실상의 사장위기에 있던 스크리아빈의 작품들을 발굴해 낸 것도 호로비츠의 업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Horowitz
젊은 호로비츠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은 6살 때, 안톤 루빈시타인과 차이코프스키에게 음악을 배웠던 대 교육자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 배우면서였으니, 가장 정통적인 러시아 음악의 흐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축복받은 조건이었다. 호로비츠는 블루멘펠트에게 음악을 배우면서 작곡에 큰 관심을 가져 장차 작곡가가 되려 했었다. 피아노에 관해, 특히 기술적인 면에 관해서는 블루멘펠트가 호로비츠에게 가르쳐 줄 것은 이미 없었다고 한다.

호로비츠의 음악가로서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이었다. 부유하고 문화적이었던 그의 집안은 혁명으로 인해 완전히 몰락하게 되고 호로비츠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급히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게 된다. 키에프를 중심으로 작은 리사이틀을 가지던 호로비츠는 1922년 카르코프에서 연주를 가졌으며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어 계속해서 15번의 리사이틀을 열게 되었다. 그의 리사이틀은 모스크바와 키에프로 이어지면서 명성을 얻게 되고 1924년에서 25년에 걸쳐 11개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23번의 리사이틀을 여는 등 70여회의 콘서트를 가지면서 초인적인 기량을 과시한다.

서방세계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혁명의 혼란이 한참이던 25년으로서 첫 번째 무대는 베를린이었다. 베를린에서 3번의 리사이틀을 성공적으로 마친 호로비츠는 다음 해 함부르크에서 후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곡이 되는 차이코프스키의 1번 협주곡을 연주하여 청중들을 경악하게 한다. 더구나 이 때의 협연은 연주에 차질이 생긴 여류피아니스트의 대타로서 갑작스럽게 무대에 서게 된 것이라고 하는데, 평소에 어느 정도의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차이코프스키의 1번 같은 난곡을 대타로 연주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천재성을 잘 드러내 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호로비츠는 1927년 당시 최고의 흥행사였던 아더 짓슨에게 발탁되어 미국에 데뷔하게 된다. 당시 미국의 청중들에게 호로비츠라는 존재는 단순히 음악적인 차원을 떠나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존재일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라는 먼 땅에서 갑자기 나타난 핸섬한 청년 호로비츠, 압도적인 기교, 폭발하는 듯이 강렬한 터치, 애매함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이 명쾌한 연주... 평론가와 청중들은 새롭게 등장한 호로비츠에게 완전히 매료되기 시작했으며 다음 해인 1928년 토머스 비첨과 함께 한 뉴욕 데뷔연주는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굳히는 계기가 된다. 이 연주회는 동시에 비첨의 뉴욕 데뷔이기도 했으며 프로그램은 차이코프스키의 1번 협주곡이었다. 후에 토스카니니와 협연하여 음반으로 남은 기록을 통해 생각하더라도 이날 뉴욕의 청중들이 받은 충격의 크기는 대강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 때를 기억하는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후에 '당시의 호로비츠는 폭풍이었다'라고 술회했듯이, 그의 연주는 얼마간 요란스러우면서도 당시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신선함과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호로비츠가 토스카니니와 만난 것은 1932년의 일이다. 흔히 토스카니니가 호로비츠의 음악적 성숙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하는데, 두 사람의 음악적 스타일에 상당한 공통점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그것이 두 거장의 만남이 있은 이후에 호로비츠에게 일어난 변화에 의한 것인지 어떤지는 의심스럽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토스카니니와의 만남과 호로비츠의 음악관이 변화한 것은 시기적인 일치 이외에는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는 듯 한데, 다만 두 사람이 협연할 때에 토스카니니의 음악적 고집을 호로비츠에게 강요한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예민한 성격이었던 호로비츠가 의외로 순순히 토스카니니와 타협을 보았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기는 하다. 이러한 만남을 계기로 호로비츠는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와 결혼하여 평생을 함께하게 된다.

이 무렵부터 호로비츠의 은퇴-복귀가 시작되게 된다. 1930년대, 호로비츠는 그야말로 엄청난 숫자의 콘서트를 가졌으며 누적된 육체적, 정신적 피로로 인해 자신을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에도 수술의 후유중, 피로, 신경쇠약 등의 이유로 평생동안 4번의 공백기간을 가지게 된다. 호로비츠의 음악적 기량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40년대에서 50년에 걸친 시간이었으며 그다지 녹음상태가 좋지는 못해도 이 시기의 음반들은 결코 내외적으로 훌륭한 균형을 이룬 그의 음악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40년대 초반에 녹음된 '전람회의 그림' (RCA)에서 - 음악적인 면에서는 그다지 점수를 줄 수 있는 연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 그는 독자적인 피아니즘의 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분방하게 종횡무진 건반을 누비는 10개의 손가락, 다이내믹하게 울려퍼지는 옥타브, 야만적인 액센트, 여린 선율에서 들릴 듯 말 듯 다가오지만 또렷하게 떠오르는 음악의 윤곽 등, 작곡자의 원래 의도는 온데간데 없이 호로비츠의 의도에 충실한 제 2의 전람회의 그림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은둔생활을 계속하던 중에 녹음된 슈만의 '어린이 정경' (CBS)에 이르면 여전히 주관적인 성격이 강한 연주라도, 4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이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녹음된 일련의 슈만 피아노곡들과 스카를랏티의 소나타들은 만년에 녹음한 모차르트의 음악과 더불어 호로비츠가 남긴 가장 값진 유산들이다.

1965년 4월, 12년간의 공백 끝에 카네기홀에서 가진 복귀연주는 극히 '미국적인'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클라이번이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우승했을 때 보여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호로비츠에게 열광했으며 연주 당일 카네기홀은 호로비츠의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유럽에서였다면 아마도 그 정도의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날의 실황은 레코드로 제작되어 ('The Historical come back' CBS)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고,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이 되었다. 이후 호로비츠는 두 번의 잠적을 더 가지게 되지만 그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으며 70년대에도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를 레퍼토리로 하여 경이적인 연주를 계속하여 들려주게 된다. 이 무렵의 기록인 '메피스토 왈츠' (RCA)라든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 (RCA, 유진 오먼디/뉴욕 필)을 통하여 들을 수 있는 호로비츠의 면모에서, 이미 그를 평생동안 따라다닌 상업성 등의 꺼림칙한 이미지는 완전히 초월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혹은 그러한 파퓰러성 마저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동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Horowitz
만년의 호로비츠
 

1986년 이미 80을 훌쩍 넘긴 호로비츠는 갑작스럽게 DG와 전속계약을 맺는다. 일생에 걸쳐 RCA, CBS 두 레코드사와 함께 해 온 호로비츠가 만년에 이르러 갑작스레 DG와 계약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가 사망할 때까지 몇 년 간 DG에서 녹음한 음반에는 또 하나의 완전히 새로운 음악세계가 담겨 있다. 이전까지의 녹음에서 들려주던 음악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음악을 호로비츠는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녹음된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같은 곡은 과거의 녹음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기교의 쇠퇴와 체력의 노쇠를 느낄 수 있다. 스크리아빈의 연습곡에서도 터치의 명료함에 있어 60년대의 녹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쳐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DG에서 남긴 모차르트의 소나타와 몇 곡의 소품들에게서 호로비츠가 평생을 걸쳐 도달한 음악의 결론이 담겨 있다고 단언해도 좋을 만큼 빼어난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단 한 소절만을 들어도 그 비범함은 쉽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리히터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86년 호로비츠는 꿈에도 그리던 모스크바 연주를 가지게 된다. 'Horowitz in Moscow'라는 제목으로 DG에서 음반과 영상물로 출판되어 있는데, 단순히 뛰어난 연주라는 것 이상의 감동을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이 연주가 진행되는 도중에는 당시 세계를 양분했던 두 초강대국간의 갈등도, 대립되는 이념으로 서로를 왜곡하고 있던 시민들의 시각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순히 감상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 영상물을 보고 있으면 - 물론 뛰어난 연출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 무의식중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호로비츠가 미국에서 가진 마지막 연주도 바로 이 해 가을에 링컨센터에서 이루어졌다. 다음 해에 호로비츠는 런던과 빈, 암스테르담, 함부르크를 순회하면서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순회연주회를 가졌다.

1989년 11월 5일 호로비츠는 병석에서가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녹음을 편집하던 중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건강상태는 나이에 비해 극히 양호한 편이었다고 한다. 평소 부인인 완다에게 남긴 유언에 따라 호로비츠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가족묘에 묻히게 되었다.

젊은 시절에 들려 주던 음악에서 호로비츠에게는 확실히 기교와 음악성 사이의 괴리를 느끼게 하는 점이 있었다. 프로코피에프의 소나타, 쇼팽의 발라드, 폴로네에즈 등에 대한 일반적인 높은 평가는 필요 이상으로 분명 과대평가된 것이며 거의 연주하지 않았던 베토벤에 대해서 그는 분명 부적격자였다. 피아니스트로서 베토벤을 잘 연주하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호로비츠가 코르토나 프랑스와처럼 프랑스 음악의 스페셜리스트도 아니었으며 어떤 작곡가의 음악을 끈기 있게 연주하여 전곡을 완성한 경우도 사실상 없기 때문에 상대적인 평가절하를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물며 연주회의 앙코르로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피아노용으로 편곡하여 연주하면서 거의 광란에 가까운 환호성을 받았던 사실은 분명히 거부감을 줄 수 있는 점이다. 하지만 만년에 이르러 열린 일련의 연주여행에서 이미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한 몸으로 제대로 깎지 않아 시커멓게 때가 낀 손톱을 하고서도 건반 앞에만 앉으면 천상의 소리처럼 맑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 주며 어린이처럼 기뻐하던 그의 모습에서 더 이상 누가 '상업주의에 물든 장사꾼'이라고 비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호로비츠가 베토벤의 음악을 잘 연주하지 못하기는 했지만 호로비츠의 생애는 베토벤의 음악을 닮았다. 젊은 시절의 패기에 넘치고 스피디한 연주스타일에서, 폭발적인 힘과 당당함을 함께 갖추었던 장년기, 슈만과 스카를랏티를 중심으로 점차 세련된 모습을 갖추어가던 60년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차르트의 티없이 맑은 세계에 도달하여 사심 없이 흥겨워하는 모습은 꼭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참고자료

http://goclassic.co.kr/artist/horowitz.html

 

 출   처: 호산의 컨트리뮤직 / 카페 / 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