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가니니

파가니니 / 24개의 가프리치오 모음

로만짜 2007. 3. 13. 04:51

Caprices for violin Op.1

파가니니 24개의 카프리치오 모음

Niccolo Paganini (1782~1840)


제24번 가단조 (Cuasi presto)

대음악가들이 앞을 다투어 변주했던 환상곡

1782년 제노바에서 태어난 니콜로 파가니니는 7살때부터 해상화물중개업을 하는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이 후 제노바극장의 바트 세르베르, 프란체스코 네코에게 사사했는데, 그의 바이올린 학습은 언제나 단기간에 집중적인 것이 특징이었다. 7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파가니니에게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배우게 했다. 하루 10시간씩의 맹훈련이었다. 아침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훈련을 시켰는데, 파가니니가 연습을 잘 안하면 밥을 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 파가니니의 연주여행동안 항상 그의 옆방을 빌려 그에게서 기술을 배우려 했던 에른스트는 " 앙콜곡으로 선사하던 카프리스를 자주 연습했는데, 한음도 틀리지 않고 연주때보다 더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내곤 했다... 그는 어렸을 때 엄청난 연습을 했음에 틀림없으며, 어떠한 어려운 악구라도 반드시 성공해내고야마는 강철같은 의지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라고 회술하고 있다.

그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통해서 할 수 있는 무한한 기교의 가능성을 실험했고, 직접 이를 실현해낸 의지의 개혁가로서 완전한 비르투오소의 표본이었다. 그의 고도의 기교가 담긴 연습곡들은 바이올린 연주가는 물론 당시 피아노 연주자 기교연마 확장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피아니스트들에게 특별히 영향을 준 작품은 <카프리스24>곡인데 그중에서도 마지막곡 A단조는 그 화려하고 단순함으로 해서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블라허, 루토스와프스키 등이 그곡의 주제를 기초로 하여 작품을 썼다. 기교파 피아니스트로서 활약했던 리스트는 당시 12곡의 초절기교용 연습곡, 2개의 연주회용 연습곡, 3곡의 연주회용 연습곡 15곡의 헝가리 광시곡 등 초인적인 기교를 요하는 작품을 썼는데 파가니니의 영향을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낸 작품으로는 1831년에 작곡한 <파가니니 대 연습곡> 6곡이 있다.

6곡중 제3곡을 제외하고는 <카프리스24>에서 주제를 취했는데 이같은 주제는 파가니니 작품에서 채택해으나 피아니스틱한 효과를 올리기에 알맞은 곡을 선택하고 있다. 또 특히 < 라 캄파넬라>라고도 불리우는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의 제3악장을 피아노용으로 편곡하여 만든 <파가니니풍에 의한 화려한 대환타지아>는 그의 작품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명곡으로 되어 있다. 또한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우며 수많은 주옥같은 피아노 작품을 남겼던 쇼팽은 이 24곡의 연습곡에서 아르페지오, 스케일, 3도, 6도 연습, 트레몰로 연습 등등 매곡마다 예술적 아름다움 외에도 특정한 기교연마의 목적을 담고 있으며, 이 밖에 슈만도 <파가니니 카프리스에 의한 6곡의 연습곡>을, 형식미와 절제미를 추구했던 브람스 조차도 기교연마를 위한 < 파가니니 변주곡 작품35 >를 남기고 있다. 이렇듯 낭만파 거장들에게 뚜렷한 영향을 주었던 초절적인 명곡인 <카프리스>는 24곡이 한결같이 간결한 소품들로 바이올린곡의 매우 색다르면서도 순수한 아름다움을 주는 명곡이다.

파가니니가 남긴 곡들은 자신의 연주회에 사용하기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아쉽게도 그가 작곡한 곡 중 상당수가 악보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파가니니 자신이 작곡보다는 연주에 더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연주회에서 악보대로 연주하기보다는 즉흥적인 연주를 즐겨 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바이올린 곡뿐이며 형식적인 면보다 즉흥적인 화려함이 특징이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쇼팽, 리스트의 <연습곡>이 텍스트라면,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있어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을 위한 무반주 카프리스>은 마치 바이블과 같은 곡이다. 피아노의 비르투오조였던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자신은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결국 그 꿈을 이룬다. 이 곡은 훗날 리스트에 의해 <솔로 피아노를 위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연습곡>으로 재탄생되며 브람스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한다. 또한 라흐마니노프도 <무반주 카프리스> 중에서 맨 마지막 곡인 '24번째 곡 - A minor'를 주제로 하여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를 작곡했다. 이처럼 파가니니의 음악은 후대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며 오랫동안 애호가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니콜로 파가니니 Nicolo Paganini(1782 ~ 1840 / 이탈리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나 프랑스 니스에서 58세로 세상을 떠난 '파가니니'는 19세기 최대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파가니니'는 19세기 초 무렵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연주 활동을 하였는데, 신기에 가까운 탁월한 기교에 전유럽이 떠들썩하게 되었다. 상식을 뛰어 넘는 연주기교에 귀신이란 별명이 붙게 되었다. 심지어 그가 쓰고 다니는 모자, 의복, 장갑 등을 모방한 의류가 상점마다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한다. 명성과 재물을 쌓았지만, 한때는 그는 방탕과 도박으로 건강을 잃었을 뿐 아니라 많은 부채로 인해 그가 소중히 여기던 바이올린 까지 팔게 되었던 적도 있었다. '파가니니'는 자신의 기법을 신비적으로 보이기 위해 단 한명의 제자 밖에는 두지 않았으며, 악보 조차도 공개하기를 꺼려했다 한다.

그래서 '파가니니'의 주법은 유파를 형성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대로 끝나게 되었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을 연마할 때는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연습을 하였다 하니 그의 기교가 단순히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파가니니'는 역사상 드물게 보는 귀재로 불가능을 모르는 뛰어난 기교와 마력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바이올린 음악은 슈만, 쇼팽, 베를리오즈,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의 낭만파 음악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파가니니'가 잘 사용 하는 기법은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절묘한 대비, 하모닉스의 효과, 왼손의 피치카토, 플레젤레트, 스코르다투라 등으로 당시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절망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뛰어났다 한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칭을 얻었을만큼 바이올린 연주에 있어 파가니니는 당대 최고의 비르투오조(대가)였다. 그의 화려하고 다양한 연주 테크닉은 아직도 의문으로 남겨져 있는데... 2중 트릴(떤 꾸밈음), 화음의 연속적인 연주, 2중 플레절렛(왼손기교의 한가지), 자연음과 플레절렛의 병행, 왼손 피치카토 등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고난도 테크닉을 구사했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기타 연주에도 탁월했는데 더블 스토핑(여러 음을 동시에 내는 기법)과 하모닉스, 왼손 피치카토 등은 기타의 연주기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초상화나 스케치에 담긴 그의 모습을 보면 괴기영화의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로테스크(?)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신기에 가까운 파가니니의 연주는 여성 팬들을 까무러치게 할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짐작케 한다. 반면에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양면성을 모두 지니고 있었던 파가니니는 여자와 도박에 빠져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바이올린을 전당포에 잡히는 등 갖은 기행을 일삼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악마의 화신이라 불린 파가니니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 제노바에서는 악마의 화신이라 불린 대음악가가 태어났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그 대가로 불세출의 연주력을 얻었다고 쑥덕거렸다. 그의 이름은 니콜로 파가니니였다. 사람의 능력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란한 기교와 뛰어난 음악성으로 듣는 이들을 기절초풍케 했다. 파가니니가 악마로 불린 데는 그의 괴이한 행동거지가 한 몫했다. 끊임없는 방랑벽과 각종 연예 사건은 물론이고 몇 년씩 사라져버리곤 하는 괴이한 행태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그는 외모도 독특했다. 깡마른 몸과 이글거리는 눈, 가는 목선에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은 그를 다른 세계와 통하는 인물로 여기게 했다. 그런 그가 일단 연주에 들어가면 미모의 소녀들과 부인들은 단번에 기절하곤 했다.

누군가 파가니니의 가르침을 받아 뛰어난 음악가가 되면 그건 파가니니의 마법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파가니니가 결혼하면 그들은 악마부부였다. 로마 교회도 파가니니가 하느님을 부정하는 자라며 공격을 퍼부었다. 로마 교회는 그가 악마의 제자로서 이 땅에 태어나 인간의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는 연주로 대중들을 유혹해 큰 이익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파가니니는 선천적으로 특별한 신체 조건을 부여받았다. 물론 천재성의 원천은 엄청난 연습량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어깨뼈와 아래팔, 손목뼈까지 매우 부드러웠다. 그리고 손바닥의 관절과 각지골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고 한다. 연주시 손바닥은 평소 상태의 2배까지 벌어졌다. 고막도 매우 민감해서 누군가 곁에서 큰 소리를 내면 상당한 통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니 선천적으로도 바이올린의 악마로 행세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바이올린의 줄이 하나든 두 개든 청중의 입을 벌어지게 하는 데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심지어 내면의 진실과 음악인의 우의를 중시하던 슈만조차도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 저녁 때 나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었다. 정말로 놀라웠다. 놀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마치 먼 곳 어디에선가로부터 다가오는 음악 같기도 하고, 침대 위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하는 음악 같기도 했다."

파가니니가 이탈리아 니차에서 죽었을 때 그이 유해는 성 레파라타 거리에 있는 별장에서 방부처리된 후 입관되었다. 그런데 교회는 유해를 매장하는 데 필요한 수속을 고의로 늦추었다. 니차의 주교가 파가니니를 기독교의 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파가니니의 매장 수속은 1년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리에주에서 발간되는 잡지 '역사와 문학'에 실린 카톨릭계의 기사는 당시 그에 대한 곱지않은 시선을 보여준다.

" 파가니니는 지난해에 니차에서 죽었다. 그는 신앙에 냉담했고 도덕적 퇴폐의 화신으로도 악명 높던 사나이다. 부활절 때 그는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를 태만히 했다. 그래서 니차의 주교가 그의 매장을 거부한 것이다."

파가니니의 친지들은 이러한 처사에 불복했다. 그리고 제노바의 추기경에게 사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추기경 역시 니차의 주교가 취한 조치에 찬성했다. 그리하여 파가니니의 유해는 관 속에 넣은채로 몇 달 동안이나 니차의 별장에 방치되었다. 파가니니의 유해가 관대에 올려져 있는 동안 귀신 같은 연주자의 주검을 보려는 사람들이 별장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갈바노 주교에게 항의라도 하듯 니차로 몰려들었다. 사체의 악취도 부근 일대에까지 풍기게 되었다. 그래서 니차의 주교는 파가니니의 유해를 지하실로 옮기도록 명했다. 결국 이 일을 못마땅하게 여긴 시의 위생 당국이 적절한 조치를 강구했다. 마침내 유해는 니차의 묘지에 매장되지 못한 채 빌라 프랑카 근처의 위생 병원에 보관되었다.

그의 이름은 교회 기록부에서도 말소되었다. 그런데 파가니니는 죽기 3년 전 그의 유언장에서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의 은총에 맡긴다고 썼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되어 고백 성사를 베풀 신부가 왔을 때도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고 교회에다 위안을 구하고 싶음을 고백했다. 그럼에도 니차의 주교는 파가니니를 사교도라고 격렬하게 탄핵했는데, 이는 파가니니가 악마이거나 악마의 사제라는 인식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파가니니의 시신은 파르마에 매장되어 있다. 1940년 고향 제노바로의 이장이 거론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카프리치오 capriccio

(이탈리아어로 '변덕'이라는 뜻) 활달하며 느슨한 구조의 악곡. 흔히 잘 알려진 대중적 곡조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카프리치오라는 말은 일찍이 16세기에도 칸초네·판타지아·리체르카레(이것들은 종종 모방 대위법에 의한 성악곡의 모델이 됨) 등 당시로서는 다소 기묘했던 새로운 양식들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프레스코발디부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 이르기까지 바로크 작곡가들은 건반 카프리치오를 통해 엄격한 푸가 작법을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변덕스러운 성격도 나타냈다.

바흐가 남긴 기록상 최초의 건반악기 작품은 〈사랑하는 형제와의 이별에 부친 카프리치오〉인데, 이 곡 안에는 마부의 뿔피리 소리 등 여러 음악외적 소리들이 인용되어 있다. 피에트로 로카델리의 24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카프리치오는 카프리치오 장르가 유행하던 19세기 니콜로 파가니니의 곡의 모델이 되었다. 베버·멘델스존·브람스 등은 많은 피아노 곡들을 카프리치오라 이름 붙인 데 반해 베토벤은 안단테·알레그로 같은 템포 악상에 부가적으로 '카프리치오적으로'라는 형용사를 간혹 붙였을 뿐이었다.

이후 차이코프스키는 관현악을 위한 카프리치오를 썼고,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스페인 카프리치오 Capriccio espagnol〉를 썼다. 좀더 최근에는 이고리 스트라빈스키가 피아노 협주곡(1929)을 카프리치오로 구상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마지막 오페라의 제목을 카프리치오로 붙였다(1942).

 

 

출   처: philharmonic / / philharmon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