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제3번 D단조 Op.30 -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로만짜 2006. 11. 14. 06:36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3번 D단조 Op.30  
Piano Concert No.3
in D minor,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3번 D단조 Op.30
Sergei Vasili'evich Rakhmaninov (1873~1943)
피아노 -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불운했던 천재 피아니스트 데이빗 헬프갓을 다룬 영화 '샤인'이후 전세계인들로부터 더욱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된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라흐마니노프가 곧 다가올 미국 연주여행을 위해 쓴 작품이지만 매우 러시아적인, 러시아성(性)으로 넘쳐나는 곡이라고 하겠다. 도입부부터 등장하는 러시아 고대 민요에서부터 그가 어떤 곡을 작곡하고자 했는지를 알려준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협주곡 3번을 1907년 드레스덴에서 쓰기 시작했고 그 뒤, 라흐마니노프 자신이 무척 행복해 했던 1909년 모스크바 근교의 자신의 영지(라흐마니노프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인 이바노브카 그리고 미국 연주여행을 하면서 작곡을 계속 진행했던, 오랫동안 공을 많이 들인 작품이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미국 피아니스트이자 친구인 조셉 호프만에게 헌정했는데 초연은 1910년 11월 28일 발터 담로쉬가 지휘하는 뉴욕 필에 의해서 행해졌으며 제2번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라흐마니노프 자신이 직접 피아노 솔로를 맡았다. 두 번째 공연은 1910년 구스타프 말러가 카네기홀에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공연이었는데 역시 라흐마니노프가 솔로 피아노를 연주, 거장적 풍모를 마음껏 발산했다. 이 곡을 들은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은 이 곡의 장대한 길이와 테크닉적인 어려움에 대해 조크를 던지면서 '코끼리 협주곡'(Elephant Concerto)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고국 러시아의 깊은 우수와 멜랑콜리를 특히 라흐마니노프가 사랑했던 이바노브카 숲속의 자연풍경을 느껴볼 수 있는 곡이다.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Rachmaninov, Sergey) =
피아니스트에게 물어보면 연주하고 난 다음에 힘이 빠지고 무언가 뻑적지근하게 느껴지는 작품이 있는데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들이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그건 물론 라흐마니노프 자신이 당대를 풍미한 대 피아니스트였기에 자신의 연주력을 바탕으로 장대한 피아노 곡을 만든 데에서 기인하지만 슬라브적 우수와 대평원에서 느끼는 광활한 에너지의 흐름이 그의 음악속 여기저기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음악사적 분류, 특히 연대적인 분류로 본다면 라흐마니노프를 어디에 소속시킬 것인지 언뜻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시기에 같은 러시아에서 활동한 스크리아빈을 보더라도 이미 근대주의 경향속에서 신비주의를 태동시키고 있었던 점을 생각할 때 라흐마니노프의 낭만적 어법은 시대를 거슬러 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1943년에 세상을 떠난 것만을 생각하면 라흐마니노프는 분명 현대음악가로 분류해야 마땅하지만 음악적 내용에서 본다면 차이코프스키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어 낭만적 민족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특히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한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협주곡을 비롯한 일련의 피아노 음악에서 불후의 명작을 남겼거니와 교향곡에서도 그가 남긴 세 곡의 작품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생애는 격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어쩌면 시련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한 경험이 오히려 그의 예술을 보다 깊이있고 설득력있게 탄생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그는 러시아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는 시골의 넓은 영지에서 풍족한 삶을 지낼 수 있었지만 농노 해방이후 부친이 영지를 사회에 환원시키게 되자 생활이 어려워지기 시작, 결국 어머니와 함께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게되었고 그곳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음악원을 졸업할 때까지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연주 뿐만 아니라 작곡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얻어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1893년 존경하던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을 맡게 되자 그를 추모하는 피아노 3중주곡을 작곡, 헌정하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자 프랑스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한때 귀국할 결심을 하기도 했지만 2차 대전은 귀국 길을 막았고 대신 지금도 레코드를 통해 그의 전설적인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피아노협주곡 음반이 바로 이때 미국에서 녹음된 것이다. 작곡가로서 그의 작품 세계는 차이코프스키를 통해 러시아 민족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범 세계성을 띠고 있다. 또한 풍부한 선율과 애수를 곁들인 서정성은 결국 20세기의 숨을 쉬면서도 19세기 낭만의 흐름을 고집해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낭만시대의 위대한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이한 작품 성향은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공부했고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연주 활동을 펼친 그의 예술적 행로가 어느 한 군데로 치우치지 않게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Vladimir Ashkenazy) =
피아니스트인 아버지의 음악교육에 따라 6세때부터 피아노 수업을 시작하여 온 아쉬케나지는 1955년 18세 때 국제 쇼팽 콩쿠르에서 2위로 입상하면서부터 그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인 1956년부터 시작된 서방으로의 연주여행은 그를 언제나 신선한 이미지를 주는 피아니스트이며, 항상 청중이 크게 기대하는 연주가라는 평을 받게 하였다. 연주를 함에 있어 그의 지향적인 규범은 자신의 감정을 살리는 동시에 선천적인 날카로운 평형감각을 음악적 조형에 적용하는 데에 있다. 그의 연주법은 소련의 명교수들이 창조한 합리적인 방법을 자신에 맞게 완전히 소화해내었다고 볼 수 있다. 유난히 작은 체구의 아쉬케나지는 자신의 큰 손으로 전신을 강한 스프링과 같이 움직이며 손 끝에 전신의 중량을 얹은 듯 정확한 기술과 감성으로 작품을 연주해낸다. 자신의 연주기법에 대한 아쉬케나지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허식을 제거하는 것이다. 베토벤이나 모짜르트의 핵심을 잡고 거기에 숨겨져있는 고유의 간결성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의 연주에 감명을 받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보내는 찬사는 그의 연주가 매우 유연하며 천부적 예술가의 기질로 생명이 약동하는 신선한 표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인데 그의 연주는 바흐로부터 프로코피에프에 이르는 다양한 레퍼토리로 최근의 연주는 인간적 성숙까지도 반영하는 깊은 정서적 표현을 가능케 해내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아쉬케나지는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위해 고국인 러시아를 떠났고 아픈 희생을 치른 만큼 독자적 연주양식을 확립해내었다. 실제로 그는 지적인 구성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과 병행하여 감정을 더욱 대담하게 표현해 왔는데, 그러면서도 음악적 순수성에서 멀어지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예술가가 만족했을 때 그 예술적 생명은 끝이 난다고 믿고 있는 그는 요즈음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성실성을 보이며 누구보다도 예술가로서의 여정을 지속시켜 나가리라 결심한다.
전 악장을 모두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벅찬 감동을 한 껏 느끼시리라 믿습니다!
조블 이웃님들 오늘도 활기찬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제1악장 Allegro ma non tanto
제2악장 Intermezzo-Adagio
제3악장 Finale-Alla bre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