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트 리스. 첼로 소나타 제3번 G단조, Op.125
베토벤의 제자이자 열렬한 신봉자이기도 한 리스의 [제3번 첼로 소나타]는 베토벤의 영향이 느껴지는 곡이다. 런던을 떠나 고향인 본으로 돌아가던 1823~1825년 사이에 작곡된 이 곡은 마치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를 듣는 착각을 들게한다. 베토벤의 고전적인 형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멘델스존등에서 볼 수 있는 낭만주의적 요소가 더해지며, 그의 음악에서는 우아하고 따스한 정감이 흐른다.
또한 명 피아니스였기도 했던 리스의 첼로 소나타는 피아노의 화려한 진행도 아름다움을 배가하고 있으며, 특히 3악장의 론도악장은 한없이 밝고 경쾌한 리스의 독창적인 피아노 음들이 빛을 내고 있다. 이 음반은 포르테 피아노의 적은 잔향과 아기자기한 울림으로 첼로의 깊이를 더욱 살려 주고 있다.
형식이나 구조면에서도 베토벤의 [제2번 첼로 소나타, Op.5-2]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실제로 유사점을 느끼게 한다. 1악장을 아다지오로 시작하는 서주의 피아노부분이나 이를 받는 첼로의 베토벤적인 안정감과 포용성이 넘치는 주제선율과 대선율적인 진행, 이어 알레그로로 진행되며, 똑같이 사용하고 있는 3악장의 론도악장도 흡사한 형식과 스케일등으로 진행하고 있다.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들은 별도의 느린악장이 없고, 악장 구성이 일정하지 않다. 2악장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제2번 소나타에서도 각 악장안에서 템포와 리듬의 변화를 주며 마치 4악장의 구조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리스의 [제3번 소나타, Op.125] 뿐만 아니라 이 음반에 같이 수록된 [Op,21의 소나타]나 [피아노와의 듀엣 실내악, Op.113]에서도 베토벤의 소나타의 형식과 첼로와 피아노의 조화방식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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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리스(Ferdinand Ries, 1784~1838)는 독일 본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 조부인 Johann Ries (1723-1784) 요한 리스는 궁정 트럼펫 연주자였으며, 아버지 프란츠 안톤 리스는 11세의 나이로 궁정 오케스트라에 들어간 음악 신동으로 후에 베토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기도 했다. 대대로 음악가족으로, 그의 초기 음악 교육은 아버지에게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며 롬베르그 (Bernhard Romberg)에게 첼로도 배웠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리스는 당대 실력있는 피아니스겸, 작곡가로 유명하였으며, 피아니스트로서 유럽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다. 신 음악잡지에 글을 기고 하기도 했으며, 베토벤과의 매우 친밀한 친분으로 여러 일화를 남기며 오늘날 기억되고 있으며, 후에 베토벤의 전기 작가로 더 잘 알려졌다.
베토벤에게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운 제자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 조력자로 비서역활과 필사일을 맡았으며, 열렬한 베토벤의 신봉자이기도 하다. 1804년 리스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자신의 카덴차와 함께 연주함으로써 공식적인 데뷔를 하게 되었다. '범상치 않은 테크닉과 매우 어려운 패시지조차 매우 익숙하고 편안하게 진행하는 확신에 차 있는 연주일 뿐 아니라 시적이며 풍부한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다...'라는 A. Musikalische Zeitung의 논평에서 처럼 연주는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 후 1805년 여름 베토벤의 추천으로 프랑스 혁명이후 어려운 시절을 궁정의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며 편안하게 연주와 작곡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리스는 1813년 부터 1824년까지 11년 동안 런던에서 활동하였고, 베토벤과의 깊은 인연과 관계는 런던시절에도 지속되었으며 음악적인 교류도 이어졌다. 그의 마지막이자 제3번 첼로 소나타는, 1824년 은퇴를 결심하며, 런던을 떠나 고향인 본으로 돌아가던 1823~1825년 사이에 작곡되었다. 이후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며, 라인 뮤직 페스티발등 여러 페스티발에 참여하며 작곡가, 지휘자로서의 활동했고, 1834년 아헨의 시립 오케스트라와 Singakademie의 감독으로 지명되었다. 1838년 53세의 나이로 그의 음악가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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