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 장조, op.61
베토벤의 유일하게 남긴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걸작의 숲'이라고 할 만큼 뛰어난 중기의 명작들이 탄생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베토벤은 '하일리겐 슈타트'의 유서를 쓴 1802년부터 차차 원기를 되찾아 창작력을 회복하던 창작중기는 자기내면으로 침잠하는 경향과 조용히 외계와 자연의 정경에 관심을 갖는 경향을 보여준다.
전자의 경우는 [교향곡 5번 운명]이며, 후자는 [교향곡 6번 전원]으로 볼 수 있으며, 바이올린 협주곡은 이 후자의 경향에 가까운 작품으로 전원적, 목가적인 정서를 지니며, 여유롭고 따스한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곡이다. 여기에는 당시 사랑하던 요제피네 폰 다임백작의 미망인에 숨겨진 애정이 스며있다고 할 수 있다.
1806년 작곡된 이 곡은, 그 해 12월 23일, 빈의 안 데어 빈 극장에서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프란츠 클레멘트에 의해 이루어졌다. 곡의 완성이 늦어 클레멘트는 한번도 연습을 하지 않은 채 초견으로 이 곡을 연주하여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클레멘트는 1780년에 빈에서 태어나 8세 때 빈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데뷔하여, 1802년부터 안 데어 빈 극장의 오케스트라 악장에 취임할 정도로 바이올린에 재능을 보인 인물이다.
그의 연주는 우아하고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며, 이런 성향이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베토벤은 클레멘트의 연주를 1794년에 처음 들었다. 그때 클레멘트의 노트에 사인을 해주어서 이 14세 소년을 기쁘게 해준다. 그 후 클레멘트는 안 데어 빈 극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베토벤과 가까워진다. 베토벤은 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그와 자주 의논하며 작곡하였고, 초고를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 악보가 1809년 빈의 미술공예사에서 처음 출판되었을 때는 본 시절부터 친구였던 슈테판 폰 브로닝에게 헌정하였다. 베토벤과 클레멘트의 실질적인 교제도 이 협주곡에서 이미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슈테판은 본의 명가 브로이닝 집안의 차남으로 베토벤보다 네살 아래였다. 그는 1794년 법률 공부를 위해 빈으로 왔으며, 그 곳에서 베토벤과의 친교가 더욱 돈독해지며 빈 궁정에서의 지위가 차츰 다져진다. 한편 베토벤은 클레멘트를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며, 1824년에도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1827년 죽음이 임박한 베토벤을 클레멘트가 방문하기도 한다.
베토벤은 이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제2악장과 제3악장을 연결할 때 카덴자풍의 곡을 썻으나. 제1악장을 위한 카덴자를 특별히 작곡하지 않았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이 곡의 카덴자는 특별히 어떤 독주자가 스스로 작곡하여 연주하는 것 외에는 거의 모두가 과거의 명바이올리니스트가 쓴 것이다. 선구적 카덴자로는 브람스와 동시대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제프 요하임의 카덴자를 들 수 있다. 이 외에 래오폴드 아우어와 프리츠 클라이슬러의 카덴자 가 있다. 즉, 요하임 시대부터 이 협주곡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결과 카덴자가 필요하게 된것이다. 결국 베토벤 시대에서 요하임 시대까지 이 협주곡은 음악회에서 연주되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할 수 있다.
- 출처. 음악세계, 작곡가별 명곡해설 라이브러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