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실내악

프란체스코 몰리노 & 존 다울랜드/ 바로크 앨범(1) - 외란 쇨셔(기타)

로만짜 2012. 5. 31. 01:00

 
 
류트 음악
 
류트를 위한 음악이 유럽에서 현저하게 일어난 것은 15∼16세기의 르네상스 시대이다. 가장 일찍 류트를 위한 태블라추어*악보집이 출판된 것은 1507년의 이탈리아로서, 독일(1511), 프랑스(1529) 등이 거기에 이어졌다.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다 밀라노(Francesco da milano), 독일의 노이지들러(Hans Newsidler), 프랑스의 르 르아(Adrian Le Roy), 헝가리의 바크파르크(Valent in Bakfark) 등이 류트 음악의 초기에 있어서 대가(명연주가 겸 작곡가)였다. 다소 뒤늦게 영국도 1600년 전후에 류트 음악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다울란드(John Dowland) 같은 인재가 뛰어난 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대의 프랑스에서 활동한 브자르(Jean-Baptiste Besard) 정도까지를 악곡의 스타일, 악기의 조현 등의 점에서 [르네상스 류트 악파]라 불러 하나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당시의 폴리포닉한 가곡을 독주용으로 편곡한 것, 당초부터 기악적으로 착상된 고도로 폴리포닉한 악곡(판타지아 등), 극히 자유로운 기악곡(프렐류드 등), 일정한 리듬을 수반하는 무곡(파바나, 갈리아르다 등) 따위를 포함했고, 또 류트 반주용의 가곡도 적지 않다. 이들 내용은 일반적으로 높고, 그 속에는 기악 작품으로 16세기를 대표하는 갖가지 명곡도 포함된다.
1630년경 류트 음악은 특히 프랑 스에서 새로운 진전을 보여 주고, 고티에(Denis Gauthier)를 중심으로 하는 [파리악파]의 류트 주자들이 당시의 신양식이였던 모음곡을 비롯한 악곡의 스타일에, 또 조현면에 신기축(新機軸)을 정립했다. 이 유파는 17 세기 후반부터 독일 방면의 음악가들에 의해 계승되고 고명한 바이스(Leopold Sylvius Weiss)를 정점으로 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뛰어난 [바로크 류트 악파]를 이루었다. J. S. 바흐의 류트곡도 이 시기에 쓴 것이다 . 그러나 류트와 그 음악은 18세기 중반부터 차츰 쇠퇴하고, 크게 발달을 보고 있던 건반악기의 세력 앞에 잊혀져 갔다. 류트와 그 광범한 레퍼토리는 현대에 이르러 재평가되었지만, 현대 작곡가에 의해 이 악기를 위 해 신곡이 만들어지는 예는 지금으로서는 매우 적다.
 
Francesco Canova da Milano (1497-1543)
 
그와 동시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Il divino'(='a miraculous lute player')라 부르곤 하였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잘 알려진 류트연주자였다. Francesco Canova da Milano는 음악가였던 Benedetto Canova의 아들로 1497년 밀라노 근처의 작은 마을인 Monza 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Mantua의 곤차가家의 류트 연주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Giovanni Angelo Testagrossa에게 류트를 배웠으나 이미 어린시절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1519년에는 교황청 녹봉을 지급받기 시작하였으며, 이태리의 류트 연주자로는 가장 저명한 직위를 보장받게 되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재미있고 믿을 만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그의 작품 가운데 두개의 작품은 교황이 니스를 떠난 이후 그가 남아 있던 프랑스에서 그의 성공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되었으며 그는 오랜동안 'Francesco of Paris로 불리웠다는 것이다.........
 
John Dowland (1563 - 1626)
 
아일랜드 출생. 1580년경부터 영 국대사 H.코밤을 따라 프랑스 ·독일 ·덴마크 등지에서 지내고 1584년 귀국하여 1588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음악학사 학위를 받았다. 로마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영국 왕실에서는 지위를 얻을 수 없어 다시 베네치아 ·피렌체 등지에 체재한 후, 1598∼1606년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를 위한 류트 연주자가 되고, 그 후 종교문제가 해결되자 런던으로 돌아와 1612∼1626년 영국 왕실전속의 류트 연주자가 되었다. 그는 연주자로서뿐 만 아니라 작곡가로서도 명성이 높았으며, 많은 가곡과 류트곡 및 류트반주곡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가곡 [흘러라 나의 눈물]은 유명하며, 여러 가지 기악곡으로 편곡되어 애창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