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베토벤/바이올린 협주곡 Op.61 - 지네트 느뵈, 바이올린

로만짜 2014. 5. 10. 00:30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지네트 느뵈 바이올린연주

     

    L.v.Beethoven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61

    violin - Ginette Neveu (1919-1949)

    Southwest German Radio Orchestra (Baden-Baden)

    conductor - Hans Rosbaud

    recording - 1949, 9.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Ginette Neveu

     

     

    1,Allegro ma non troppo

     

     

    2,Larghetto

     

     

    3,Rondo(Allegro)

     

     

    1~3 순으로 연속듣기

     

     

    베토벤의 바이올린협주곡인 이 곡은 1806년 그가 36세때의작품이다.

    베토벤은 여기서 바이올린의 성능을 최대한으로 구사했으며 오케스트라와 융합을 이루어 교향곡적인 성과를 올리고있다.

    그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군에 점령당하고있었지만 불멸릐연인 테레사와의

    희망에찬 교제가 한창이었으므로 그에게는 가장 행복한시기였다.

    규모가 큰 구상에 풍부한 정서, 찬연하고 어려운 기교등으로 보아 그의 독특하고 힘찬 정열을 가진 작품이다.

     

    베토벤이 남긴 단 하나밖에 없는 바이올린협주곡이지만 음악사에 길이 남을 걸작중의 걸작으로 꼽히는 명곡이다. 아울러

    연주자들이 가장 꺼리하는 곡이기도 하다. 뫼저가 비인 극장 신문에 기고한 초연 당시의 평을 보면 이 곡이 "독창적이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앞뒤의 연결이 때로는 중단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몇군데 평이한 것을 되풀이하고 있어 권태를

    느끼게 한다" 고 쓰고 있는데 속단일지 모르지만  바로 이런 점이 이 곡을 접근하는 가장 큰 어려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천하의 코간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신중함과 조심스러움을 잠시도 놓지 않고 있다.

    아마도 오이스트라흐라면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겠지만 코간은 이점에서 분명 오이스트라흐와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혹시 코간도 젊은 시절의 연주였다면 이보다는 과감 했으리라 짐작을 해본다. 흔히들 베토벤의 바이올린협주곡은 브람스의

    바이올린협주곡을 거친 다음 마지막으로 도전해야 한다고 하는데,코간의 경건하리만치 절제된 연주가 그 말을 입증하는 듯 하다.

    코간이 세상을 떠난것이 1982년이고 여기에 수록된 연주가 1980년의 일이니 실로 이쯤이면 마지막 도전이 아닌가 싶다.

    오랜 생각과 정리 끝에 곡을 완성하는 것이 베토벤의 습관이었던 만큼 1806년 한 해동안의 작업으로 이런 대곡을 완성한 것은

    베토벤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라 할수 있다. 하지만 예정된 연주회 날짜가 촉박하여 작업을 마치는 바람에 당시 협연자로

    나섰던 클레멘트는 초견으로 연주에 임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초연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지만 상당히 난곡 이었던 만큼 이 후 6년만에 베를린에서 토마지니가 무대에 올렸고 1828년,

    1833년 그리고 1836년에 각각 베이요와 비외탕,울리히 같은 대가들이 연주했다는 기록만이 겨우 전해질 뿐이다.

    하지만 요하임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는데 멘델스존의 지휘로 13세의 나이에 이곡을 연주한 요하임은 이후 평생을

    이 곡과 더불어 지냈고 그로 인해 베토벤의 이 바이올린협주곡은 다시금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피아노협주곡에서 그랬던 것 처럼 이 곡에도 자신의 카덴짜를 붙이지 않았는데 , 오늘날에는 요하임과 아우어,

    그리고 크라이슬러의 카덴짜가 자주 연주 된다. 

     


    20세기 바이올린 역사에서 가장 아깝게 요절한 천재로 기록되고 있는
    지네트 느뵈 (Ginette Neveu).  

    이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지네트 느뵈가 30세의 나이에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뜬 해인 1949년 녹음 된 연주곡.
    전 악장을 휘몰아 치는 타오르는 열정과,  따뜻한 심성이 녹아든
    아름다운 시정...그녀의 맑은 영혼이 배어 있다.
    그러나 불꽃 튀는 열정 뒤의 쓸쓸함은 예감적 슬픔일까.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바이올린
    교사였던 어머니로부터 음악의 기초를 배우고 5세 때 린 탈뤼엘
    강좌에 입학하여 바이올린을 배웠다.

    1935년 바르샤바의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에 참가한 그녀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를 차석으로 제치고  당당하게 우승했다.
    프랑스적인 우아한 연주는 아름다움의 극치였으며, 다른 연주자들이
    감히 따라오지 못할 다양한 음색과 비브라토를 가졌다고 그의 스승
    플레슈가 말했다. 

    사후, 발견 된 그녀의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직업적 고독 없이 위대한 일을 이룩할 수는 없다.
    진정한 위대함은  아마도 눈부시게 빛나는 고독일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이따금 소심해진다.
    그러나 죽음은 사람이 내부에 지니고 있는 생명과 이상에 따라
    받아 들여야 하는 숭고한 존재일 뿐. 인생이라는 이 '슬픈 체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원하지 않는 커다란 고난의 시기에 불과하다.'

     

    1947년 11월 13일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데뷔했을 때, 미국에서 가장 신랄하기로 이름난 유명한 비평가인 버질 톰슨은 이렇게 썼다.

     

    <지네뜨 느뵈는...... 전후 우리가 듣는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는 유럽의 젋은 예술가 중에서 갖가지 점으로 보아 가장 뛰어나다. ...... 그녀는 위대한 예술가이다. 왜냐하면 음색과 기술 및 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재미있는 예술가이다. 왜냐하면 독특한 리듬과 커뮤니케이션의 특별한 격렬함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폭 넓고 숭고하며 우아하게 해석된 브람스의 협주곡이란 좀처럼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데뷰 연주회에서 이러한 찬사를 획득한 지네뜨 뉘베(Ginette Neveu 1919~1949)는 20세기 바이올린 역사에서 가장 아깝게 요절한 천재로 기록되고 있다.

     

    천부적 재능을 갖고 1919년 파리에서 태어난 그녀는 겨우 11살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 불과 8개월만에 1등상을 받고 졸업했다. 그 이듬해인 1920년, 빈 콩쿠르를 계기로 칼 플레시에게 인정을 받아 4년 동안 이 거장의 사사를 받고, 16살때인 1934년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에서 금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여겨지는 러시아 출신의 26세의 다비트 오이스트라흐를 제치고 우승하였다.

     

    지네뜨 느뵈는 칼 플레시와 조르쥬 에네스코에게서 사사를 받았으나 어느 특정한 악파를 대표하고 있지는 않다. 그녀는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에게 가장 잘알맞는다는 것이면 무엇이든 즉 프랑스, 벨기에, 러시아 그 어느 악파로부터도 다 따왔다. 이러한 그녀의 특성은 활을 잡는 모양으로 모든 바이올린 연주의 권위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녀는 어떤 날은 하이페츠처럼, 다른 날은 프란체스카티처럼, 또 어떤 날은 띠보같은 운궁법을 보이기도 했다. 

     

     

     

    플레쉬의 증언에 의하면 느뵈의 음색과 비브라토는 다른 어떤 연주자들도 따라오기 어려운 다양성을 갖고 잇었다고 한다. 낱낱의 음계는 곡에 따라 명석하게 조정되었고, 스승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적인 우아함은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특히 라벨의 <치간느>를 연주할 때 그녀는 살롱풍의 빼어난 기품을 이 난곡을 통하여 선보이곤 했다. 1919년 파리 태생
    7세때 브르흐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공식 데뷔.
    에네스쿠를 스승으로 모시고
    파리음악원에 입학한후 8개월만에 일등상을 따낸다. 이것은 비에니아프스키가 반세기 전에 세운 기록을 경신한 것이기도 했다.
    1931년이 되자 느뵈는 칼 플레쉬의 문하에 들어간다. 플레쉬는 어린 느뵈에게 콩쿠르를 통한 자기계발을 권했고, 그렇게 해서 단 한달 반의 준비기간을 거쳐 도전한 것이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였다.
    오이스트라흐에게는 차석입상의 당혹감이, 그리고 그녀에게는 우승의 영광이 주어졌다.


    20세기의 바이올린의 역사에서 느뵈는 가장 아깝게 요절한 천재로 기록되고 있다.
    그녀 이전에 에리카 모리니라는 비범한 재주를 지닌 여류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으나, 느뵈만한 넓은 식견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느뵈는 여류라는 수식의 관을 씌울 필요가 없는 철저한 프로 바이올리니스트 였다.
    1949년에 있었던 비행기 추락사고는 이 시대의 가장 빼어난 바이올린 주자 한 사람을 앗아간 셈이다.

     

    1949년 1월 27일 3번째 미국 여행을 위해 그녀를 태운 비행기가 아조 레스 제도의 산에 충돌하여 그녀에 피아노 파트너인 오빠 쟝 느뷔와 함께 비극적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녀가 죽은 사고현장에서 파도에 밀려 그녀에 애기 스트라디바리 케이스만이 딩굴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크라이슬러나 티보 정도의 명인이 되었으며 20세기 후반의 바이올린의 판도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바이올린과 함께 불꽃처럼 살다가 30세란 짧은 생애를 비행기 폭발의 섬광과 함께 종지부를 찍은그녀의 시신은 파리 교외 쇼팽무덤 근처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 파리엔 그녀의 이름을 붙인 거리가 있습니다. 그녀가 남긴 음반 중 도브로벤, 주스킨트 / 필하모니아와 협연한 브라암스,시벨 리우스 협주곡이 훌륭합니다. 오빠 쟝 느뵈의 반주 아래 드뷔시 소나타, 라벨 찌가느 관현악 반주의 쇼송 <시곡>이 수록된 음반 (EMI 46~48)은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영혼의 불꽃, 정열의 연소가 담겨진 그녀의 대표적 녹음으로 길이 그 빛을 잃지 않을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