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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 / 피아노협주곡 1번 - Sviatoslav Richter, Piano

로만짜 2008. 3. 10. 06:21

Piano Concerto No.1 in Eb major, S.124

리스트 / 피아노협주곡 1번

Franz Liszt 1811∼1886

Kirill Kondrashin, Cond / London Symphony Orchestra

쇼팽의 친구이자 '피아노의 왕자'라고 불렸던 리스트도 쇼팽과 마찬가지로 피아노 협주곡을 두 곡 밖에 쓰지 않았다. 이것도 참 우연한 일이다. 하긴 리스트의 경우에는 이밖에도 습작 정도의 것을 몇 곡 썼던 모양이지만 현재 일반적으로는 두 곡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두곡도 거의 같은 무렵에 착수한 것이다. 이 제1번은 1849년에 작곡되었다. 리스트가 카롤리네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 사랑에 빠진 뒤, 그녀의 권고에 따라 화려한 피아니스트로서의 연주생활을 그만두고 바이마르 궁정악단의 지휘자 겸 작곡가로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전해인 1848년이므로, 그가 인간적으로나 일에 있어서나 점차 성숙해 갔던 시기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곡은 완성된 뒤 6년 동안은 공개석상에서 한번도 연주되지 않았고 그뒤 1851년에는 더 완전을 기하기 위해서 가필 수정되었다. 리스트가 자기에게 있어서 첫 피아노 협주곡인 이 곡을 발표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을 기했는가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창작태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초연은 1852년 2월에 바이마르 궁정 연주회에서 행해졌다. 피아노 연주는 작곡자 자신이 했고 지휘는 마침 리스트를 찾아온 베를리오즈가 맡았다. 이 두 사람은 다 개성이 강한 음악가였으며, 이 연주회는 참으로 상상 이상의 재미로 끝났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이 곡은 구성에 있어서 종래의 고전적 협주곡의 스타일을 완전히 깨뜨리고 있는 것이 큰 특색이다.

첫째, 전체는 네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는데 각 부분은 중단 없이 연주되므로 마치 교향시 같은 느낌을 준다. 둘째, 베를리오즈가 <환상교향곡>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고장악상처럼 제1악장의 서두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동기가 전체를 통하여 중요한 구실을 한다. 셋째, 제3악장에 협주곡으로서는 드물게도 스케르초를 두고 있으며, 또 트라이앵글을 사용하고 있어서 한슬릭(E. Hanslick)같은 독설가는 <트라이앨글 협주곡>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리스트는 이 곡에서 피아노가 갖는 기능을 최고도로 발휘시키고 있다. 당시는 마침 피아노가 급속히 개량되고 있었는데, 그 기능의 한계점까지 구사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케스트라와 충분히 맞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완전히 압도하기도 한다. 이 곡을 들어보면 피아노는 마치 오케스트라와 같은 다채로운 효과를 내고 있다. 고금의 피아노 협주곡을 통틀어서 피아노를 이처럼 찬연하게 하는 작품은 그 예가 없다.

<제1악장> Allegro maestoso. 곡머리에 연주되는 전곡의 표어라고 함이 마땅한주제는, 웅대한 악상으로 장려한 기교로써 나타난다.


1악장 Allegro maestoso
Sviatoslav Richter, Piano
London Symphony Orchestra
Kirill Kondrashin, Cond

<제2악장> Quasi adagio - Allegretto vivace - Allegro animato. 아름다운 애수를 띤 마디의 기복이 매력을 늘려 사람들을 황홀케한다.


2악장 Quasi adagio
Sviatoslav Richter, Piano
London Symphony Orchestra
Kirill Kondrashin, Cond

<제3악장> Allegretto vivace - Allegro animato. 화제의 트라이앵글이 경쾌하게 나온다. 비평가의 비난을 정면에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훌륭하다. 경쾌하고 화려하게 멋진 느낌으로 가득하다.


3악장 Allegro Vivace - Allegro animato
Sviatoslav Richter, Piano
London Symphony Orchestra
Kirill Kondrashin, Cond

<제4악장> Allegro marciale animato. 현란한 피아노의 연주는 강하고 크게 한없이 변화하여, 싱싱한 힘과 빛이 반짝이는 것 같다.


4악장 Allegro marziale
Sviatoslav Richter, Piano
London Symphony Orchestra
Kirill Kondrashin, Cond

● 불멸의 거장 -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Sviatoslav Richter)

음악성을 배제한 단순한 비교가 되겠지만 피아니스트로서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Sviatoslav Richter, 1915-1997)는 지휘계에서의 므라빈스키나 카라얀의 존재감을 훨씬 능가 하는 존재이다. 그는 재작년 사망할 때 까지 러시아 국민이기를 고집했으며, 또한 음악적인 면에서나 음악외적인 면에서나 여러 가지로 신비스러운 면모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연주자 였다. 리히터는 사회주의 교육체제가 만들어 낸 피아니스트라고 말하기에는 상당히 특수한 교육과정을 밟았으며, 길렐스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피아니스트들의 전형적인 음악과도 전혀 다른 그만의 독특한 음악성을 가지고 있었다.

리히터의 생애

리히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의 아버지가 항상 논의되는 것은 나중에 있을 그의 불행하고 불법적인 죽음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슬라브의 혈통을 이은 러시아인이 아니라, 음악계의 가장 정통적인 맥을 잇는다고도 할 수 있는 독일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부친은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빈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한 독일인이었다. 캐리어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한 수준의 피아니스트였던 것 같은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우크라이나로 옮길 수 밖에 없었던듯 하다. 그는 여기에서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이 때 만난 여성과 결혼하여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를 낳게 되었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는 위와 같은 경위로 1915년 3월 20일 우크라이나 치토미르(Zhitomir)에서 태어났으며 부모가 모두 음악가였으므로 이것만으로도 이후의 위대한 피아 니스트가 될 수 있었던 좋은 환경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 리히터는 아버지 리히터로부터 피아노의 기초만 배운 듯 하며 어릴 때 다니던 어린이를 위한 음악프로그램에서도 곧 탈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10대 중반에 이미 리스트의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테크닉을 익히고 있었고, 대부분의 곡을 초견으로도 연주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상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가 피아노를 익힌 것은 거의 완전한 독학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훗날 나타나는 그의 대단히 강렬하고 개성적인 곡 해석은 음악가로서의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를 완전한 독학으로 지냈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데, 독학으로 악기와 음악을 배운 사람이 그러한 집중력 높은 해석과 완벽한 기교를 몸에 익혔다는 것은 달리 그 경우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리히터는 그 천재적인 음악에 대한 재능을 주위에서 인정받아 오데사(Odessa)의 필하머니 협회와 오페라극장에서 반주 피아니스트로 근무할 수 있었다. 리히터가 그의 스승인 하인리히 네이가우스를 만난 것은 19세때라고 전해지는데 실제로 네이가우스의 문하에 들어간 것은 22세 때인 1937년이었다. 리히터가 프로코피예프의 제 6번과 7번 소나타를 초연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그가 프로코피예프를 알게 된 것은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네이가우스의 소개 때문이었다. 리히터의 기량에 경탄한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6번 소나타를 리히터에게 초연을 의뢰하게 되고 1940년 11월 26일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이 곡을 가지고 리히터는 늦은 데뷔연주를 하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모든 피아노곡 중에서 가장 난해한 기교를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곡을 리히터는 완벽하게 연주해 냈고, 뛰어난 연주가들의 명연주를 수없이 접해 왔던 모스크바의 청중들도 이 낮선 피아니스트의 연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전해진다. 프로코피예프는 그의 연주에 대해 "리히터의 연주를 듣고서야 내 소나타가 얼마나 대단한 곡인지를 알 수 있었다." 라고 감탄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때 네이가우스의 문하에는 이미 35년부터 길렐스가 공부하고 있었으며 그의 마스터클래스를 37년에 떠났다고는 하지만 벌써 빈 콩쿠르와 이자이 콩쿠르에서 준우승과 우승을 한 유명한 길렐스보다도, 리히터를 프로코피예프에게 접촉시켜주었다는 점이다. 물론 프로코피예프도 길렐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6번 같은 걸작을 리히터에게 초연하도록 했다는 것은 그의 비범함을 길렐스보다 한 수 위로 쳐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무렵 2차 대전이 본격화되면서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하게되고, 독일인인 리히터의 아버지는 러시아의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오데사는 루마니아군에게 점령당하고 아버지는 불법적인 고문 끝에 옥사하였는데, 모스크바에 있는 리히터에게는 이들 소식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모친과도 연락이 두절되어 리히터는 아마도 그의 생애 중 가장 불안하고 불우한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정치제제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동방과 서방이 대립하고 있던 무렵, 양진영은 정치, 군사적인 문제뿐 아니라 과학기술이나 문화적인 면에서도 심각하게 대립하였는데, 지금 보면 코믹하게까지 보이는 에피소드이지만 당시의 대립은 상당히 본격적이었던 것 같다. 미국과 러시아의 달나라 로켓경쟁을 비롯하여 문학, 영화, 음악에 이르기까지 서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이들은 전력을 기울였는데, 음악에서는 므라빈스키, 오이스트라흐와 길렐스 등이 50년대부터 그 음악체계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서방세계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확실히 압도적인 역량을 지닌 명인들이었지만, 길렐스가 55년에 미국을 방문한 이후 5년이 넘도록 리히터는 서방세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이 때의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명확한 사정을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리히터의 음악이 비록 뛰어나기는 하지만 러시아의 음악을 대표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애매성과 퇴폐성을 배척하는 사상이었으므로, 길렐스와 같이 직선적이고 극히 명인적이며 건전한 경쾌함을 지닌 연주야말로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정신을 대변할 수 있으면서도 서방의 음악가들을 압도할 수 있는 독자적인 매력이 있다고 러시아의 문화담당자들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인민 예술가'로 추앙받으며 비슷한 시기에 서방에 자주 모습을 나타냈던 므라빈스키나 오이스트라흐의 경우에도 공통적인 음악성이 발견되는 것으로서 어느 정도의 가능성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리히터의 연주를 서방에 선보이지 않을 리는 없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음악의 우수성을 '제1진'에 의해 마음껏 과시한 후, 본격적인 '침공'의 의미로서 투입된 것이 리히터였을까? 실제의 이유야 알 수 없지만 1960년 리히터가 미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후 그의 명성은 확고부동한 것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리히터에게 남아있는 '전설'이란 이미지는 이미 이 때부터 사람들의 의식속에 박혀진 것이리라.

리히터의 음악

리히터의 음악은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집중력이 높으며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있다. 리스트를 비롯한 여러 기교적이고 데모니시한 음악들에 특히 강하기는 했지만, 바하의 평균율 전곡녹음을 통해서 보여준 음악의 깊은 통찰력은 이 피아니스트의 '독학경력'을 의심하게 할 정도로 많은 연구를 통한 음악에의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발매된 '평균율'의 해설지에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과 바하의 평균율을 모두 최고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음악가'라는 구절이 있으며, 이것은 리히터의 음악을 아주 적절히 나타내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평균율에 좋은 연주를 남긴 피셔나, 굴드, 굴다, 쉬프같은 피아니스트들을 생각해보고, 또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으로 유명한 아르헤리치나 길렐스, 호로비츠같은 명인기를 앞세우는 피아니스트들을 생각해 보면 이들 사이에 공통분모를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쉽게 알수 있는데, 리히터는 희귀하게도 두 음악을 다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음악적인 수용능력이 큰 사람이었다.

그가 연주한 슈만의 '환상곡(EMI, 61년)'을 들어보면 곡 전체에서 무서울 정도의 긴장감과 박력이 직설적으로 전해져 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드라마틱한 긴장감이 한시도 중단되지 않으며, 템포의 변동에 의해 느껴지는 박력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연주가 주는 박진감은 음악에 대한 집중력과 강력한 터치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아르헤리치와 같이 정열적이고 분방한 연주에 의한 박진감과는 완전히 그 뿌리를 달리하는 것이다. 리히터의 이러한 면을 잘 느낄수 있는 또 하나의 음반은 유명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w/카라얀, 빈 심포니, DG, 62년)의 녹음으로, 1악장의 여유있는 템포에서도 압도적인 박력을 느낄 수 있으며, 3악장 클라이막스의 폭발하는 듯 한 튜티는 마치 '미쳐 날뛰는 듯 한 카라얀'의 놀라운 반주와 더불어 20세기의 피아니즘의 한 정점을 만들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만년에 접어들어 연주활동을 급격히 줄여 나갔고, 그가 한 번 무대에 서면 전 세계의 음악계가 그를 주목하였다. 만년의 그의 연주는 전성기때의 연주와 비교해서 악곡 해석상의 완전한 '탈피'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무대에 설 때는 조명을 완전히 꺼버리고, 무대 안쪽의 작은 조명만을 살려 자신의 머리의 실루엣만을 볼 수 있도록 요구했었다고 한다. '음악을 듣는데에 눈은 필요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으며, '악보를 외울 시간에 연습을 더 하겠다'며 암보를 하지 않고 악보를 보고 연주를 하는 유별난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리히터는 오직 20세기만을 살다 간 피아니스트들 중 가장 위대한 연주자이며 심지어는 호로비츠도 그의 업적과 비교될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 전율과, '소리에 담긴 환상'을 전해주는 그의 음악을 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큰 한계를 느낀다. '음반'이라는 편리한 도구를 이용해 앞으로도 계속 리히터의 연주를 들으며, 레코드와 리히터에게 새삼스럽게 감사를 표해야하지 않을까? 길렐스와는 달리 그의 유산은 레코드로밖에는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연주자 해설: 고클래식》

글출처: 웹사이트 / 음원출처: 향기로운 삶의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