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 中 'Qui la voce sua soave' [그의 달콤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네] / 조수미
오늘은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중에서 'Qui la voce sua soave' [그의 달콤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네] 를 올립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조수미'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벨리니 [Bellini, Vincenzo, 1801.11.3~1835.9.23 이탈리아]
Qui la voce sua soave.
Qui la voce sua soave
mi chiamava...e poi spari.
Qui giurava esser fedele,
qui il giurava,
E poi crudele, mi fuggi!
Ah, mai piu qui assorti insieme
nella gioia dei sospir.
Ah, rendetemi la speme,
o lasciate, lasciatemi morir.
Vien, diletto, e in ciel la luna!
Tutto tace intorno intorno;
finche spunti in cielo il giorno,
vien, ti posa sul mio cor!
Deh!, t'affretta, o Arturo mio,
riedi, o caro, alla tua Elvira:
essa piange e ti sospira,
vien, o caro, all'amore, ecc.
(그의 달콤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네)
여기 있었지 달콤한 그의 목소리
나를 불렀지... 그리고는 사라져버렸어.
여기서 그는 맹세하였지 성실할 것을,
그것을 그는 맹세했어,
그리고는 잔인하게도, 내게서 도망쳤어!
아, 더이상 이제는 함께 하지 못하네
기쁨의 탄식 안에서.
아, 돌아오라 내게 희망이여,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게 해다오.
돌아오라, 내사랑, 하늘에 달이 떳어요!
모든 것이 조용하오 주변에;
하늘에서 날이 샐 때까지는,
와서, 내가슴에 안겨요!
서둘러요! 오 나의 아르투로
돌아와요, 내사랑, 당신의 엘비라에게:
그녀는 울고 한숨짓는다오 당신 때문에,
와요, 오 님이여, 사랑에게로...
벨리니 [Bellini, Vincenzo, 1801.11.3~1835.9.23 이탈리아]
감각적 표현력이 강한 독자적인 양식의 성악 선율을 만드는 데에 천부적 재능을 지녔다. 그는 바그너의 초기 작품을 포함한 그 이후의 오페라 작곡가들뿐만 아니라 쇼팽과 리스트 같은 기악음악 작곡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음악가 가문에서 태어난 벨리니는 오르간 연주자인 아버지가 입학시킨 나폴리 음악원에 재학중 첫번째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후 벨리니는 영향력있는 오페라 흥행주의 후원을 얻어 그의 의뢰로 나폴리 오페라를 위해 〈비안카와 페르난도 Bianca e Fernando〉를 작곡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다른 작품들을 의뢰받았는데 특히 밀라노에 있는라 스칼라 극장을 위해 작곡한 〈해적 Il pirata〉(1827)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아울러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희극 작가인 펠리체 로마니를 대본작가로 쓰는 행운도 안았는데 이후 여섯 작품을 로마니와 공동으로 만들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을 개작한 〈카풀레티가와 몬테키 I Capuleti ed i Montecchi〉(1830)와 <몽유병 여인La sonnambula>(1831)·〈노르마 Norma〉(1831)가 있다. '오페라 세미세리아'(심각한 내용이지만 행복하게 끝나는 오페라)에 속하는 〈몽유병 여인〉은 영국에서까지 큰 인기를 얻어 영어로 번역되어 공연되기도 했다. 고대의 갈리아 지방을 무대로 한 대표작 〈노르마〉는 초연이 실패했는데도 지속적인 성공을 누리고 있는 작품이다.
1833년 런던에 잠시 머물렀던 벨리니는 파리로 가서 로시니의 영향을 받아 테아트르 이탈리엔 극장에서 오페라를 의뢰받고 〈청교도 I puritani di Scozia〉(1835)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부적절한 대본이 약점이긴 하지만 그의 작품 중 가장 야심적이고 아름다운 오페라이다. 벨리니의 명성은 전적으로 당대 명가수들의 벨칸토 창법에 의존한 것이었다. 개혁가가 아니었던 그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이상과 동일했고 명료성, 형식과 멜로디의 우아함, 가사와 음악의 밀착된 결합을 추구했으며 인내를 가지고 당시 오페라의 폐단을 고쳐나갔다.
관현악단의 반주보다 가수의 노래를 더 중시해 가수의 목소리를 극적 표현의 주된 수단으로 삼았으나, 그의 화성은 동시대인이었던 도니체티에 비한다면 매우 획기적이었으며 서주와 간주에서 관현악의 처리는 형식적인 겉치레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벨리니를 영원히 기억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성악 선율의 독자적인 매력과 우아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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