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실내악

에릭사티(Erik Satie) / 짐노페디(Gymnopedies) - Aldo Ciccolini (piano)

로만짜 2007. 6. 1. 04:04




'에릭사티'(Erik Satie, 1866~1925)
'짐노페디'(Gymnopedies)




'에릭사티'(Erik Satie, 1866~1925)

I. Lent et douloureux


Aldo Ciccolini, piano


II. Lent et triste


Aldo Ciccolini, piano


III. Lent et grave


Aldo Ciccolini, piano


'3개의 짐노페디' 는 청정지대에서 길어 올린 맑은 샘물처럼 세속의 때가 묻지 않고 투명하다. 현란한 기교와 숭고하고 장엄한 분위기만을 음악의 미덕으로 삼던 시류에 반기를 든 그의 음악은 한마디로 솔직담백하다. 멜랑콜릭한 부분이나 밝고 쾌활한 악절이 모두 그렇다.

짐노페디는 고대 스파르타의 연중 행사의 하나인 제전으로 나체로 젊은이들이 합창과 군무로써 신을 찬양하는 것을 말한다. 샤티는 이 이색적인 소재를 프로벨의 소설 <사란보>의 일부에서 착상하여 1888년에 3곡의 조곡으로 작곡하였다. 그후 드뷔시가 이 조곡의 1번과 3번을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현재 연주되고 있는데, 드뷔시는 3번을 1번으로 하고 있다. 관현악 반주의 하프 연주도 감미롭지만, 역시 관현악 반주의 바이올린 연주도 무척이나 감미롭다. 여기서 바이올린은 약음기_울림을 작게 하는 장치를 끼고 연주하고 있다.




 
Erik Satie / Gymnopedies


[작품 해설]

20세기 음악계의 이단적 존재 "에릭사티(Erik Satie, 1866~1925)가 22세인 1887년에 작곡한 곡 <짐노페디>이다. 이 곡은 기이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원래 "짐노페디"란 고대 스파르타의 연중 행사의 제전의 하나로, 나체의 젊은이들이 합창과 군무로써 춤을 추며 신을 찬양한 것을 말하는데, 사티의 '짐노페디'는 1888년 작곡된 3곡의 모음곡이다. 사티는 이 고대의 제전의 춤을 3곡으로 된 피아노 모음곡으로 그린 것이다. 처음엔 일정한 리듬이 반복되어 단순한 듯 들리나 절제된 선율의 고대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에릭 사티는 21세부터 몽마르트의 카바레 <흑묘- 검은 고양이>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하면서 세 개의 중요한 피아노 연작인 <사라방드>(1887), <짐노페디>(1888) <그노시엔느>(1890)을 작곡한다. <짐노페디>는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사티의 곡이 되었다. 사티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 '드뷔시'와 오랜 우정을 나누었는데, 그의 영향을 받은 드뷔시는 <짐노페디> 두 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하였으며, 제 2번은 리처드 존스가 편곡하였다.

제 1번은 느리고 비통하게, 제 2번은 느리고 슬프게, 제 3번은 느리고 장중하게의 형식이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많이 끌고 있는 그의 피아노 작품은 1888년에 작곡한 세 곡의 <짐노페디>이다..(사티는 작품들을 셋씩 분류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후에 드뷔시는 이들 중 제 1번과 제 3번의 관현악 편곡을 사티에게 헌사하였다. 이 세 작품들을 처음 들을 때는 그들간의 차이점을 발견하기가 힘들지만 여기에는 분명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는 조각작품 주위를 돌 때의 상황에 견주어 이야기 할 수 있는데, 본질적으로 변함없는 한 개의 사물을 가운데에 두고 각각 다른 세 각도에서 바라볼 때 생기는 차이에 비유될 수 있다.

에릭사티의 인생은 불행했다.. 그는 참으로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음악에 있어서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의견을 고집했다. 사회성이나 사교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 그는 생활에서는 고립되어 있는 외톨박이였다. 화가이자 모델이었던 현대에도 미술사에 등장하는 페미니스트인 수잔 발라둥과의 짧았지만 결렬했던 3개월간의 동거 생활은 사티의 인생 전체에 그림자가 되고 말았다. 수잔은 어느 밤 사티와의 결렬한 싸움끝에 사티의 아파트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만다. 추락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찰과상으로 그치고 말았으나, 그것이 사티와 수잔의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사티는 죽을 때까지 그 누구도 자신의 아파트에 들여 보내지 않았다. 친구들이 그의 아파트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로부터 25년이 지나 그가 사망한 뒤었다.

사티는 57세로 죽었다. 죽을때까지 그는 혼자였으며 죽은 뒤에 그의 방에 들어간 친구들은 그의 방문 위에 걸려 있는 두 장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사티가 그린 수잔의 초상화(유치한게 못그린)였고, 곁에 걸린 다른 하나는 수잔이 그려 준 사티의 초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