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음악을 어느 정도 알고 들으려면, 음악 외적으로 먼저 이해해야 할 사항들이 너무 많아 부담스럽다.
물론 음악을 비롯한 모든 예술, 나아가 문화현상들이 당시의 다양한 시대적 배경을 토대로 한 산물이겠지만
바그너의 경우는 그 배경이 너무 복잡해서 웬만한 아마추어들은 골치 아파서 아예 접근을 포기할 정도이다.
쇼펜하우어, 니체 철학은 기본이고 문학, 미술, 죵교, 정치, 역사, 고대신화로 까지 그 영역을 확대해가면서
바그너는 단순한 '소리의 음악'을 뛰어넘어 '멧시지 있는 종합 무대예술'을 위한 작품세계를 추구해 나갔다.
이렇듯 거의 모든 인문학 분야에 경계룰 무시하고 넘나들었던 그의 넓은 스케일과 적극적인 사회활동 덕분에
욕심 많은 바그너는 다른 음악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폭발적인 영향력을 세상에 행사할 수 있었고
지금도 바그너식 종합예술 왕국의 절대군주로서 지구촌의 수많은 바그네리안들의 경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그너 선생은 친절하게도 나같이 단순명료한 사람을 위하여 비교적 만만한 가곡집 하나를 남겼던 바,
이 베젠동크의 가곡을 듣는데는 만수산 드렁칡 처럼 얽히고 섥힌 그 복잡한 사전지식들은 다 뿌리쳐버리고,
딱 두 가지만 알면 된다. 즉 '마틸데 베젠동크'라는, 모나리자와 정윤희를 버물려놓은 듯 아름다운 한 여인과
서양음악사에 여러모로 신기원을 마련한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바로 그 두 가지이다.
미리 요약하자면, 바그너는 마틸데 여사가 써 준 다섯 편의 시에 곡을 붙인 '베젠동크의 가곡'을 남겼고
얼마후에 그 시와 선율의 일부를 확장,발전시켜서 불후의 명작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핵심 주제로 쓰게 된다.
R. Wagner; Wesendonk Lieder, 5 songs for voice & piano (or orchestra), WWV 91
1. Der Engel (천사) [3:31]
2. Stehe still (멈추어라!) [4:06]
3. Im Treibhaus (온실에서) [6:56]
4. Schmerzen (번뇌) [2:53]
5. Träume (꿈) [5:06]
* 1,5,3,2,4 곡 순으로 실행됨 (순전히 작성자의 취향에 의함) *
는 독어, 영역 가사 Eileen Farrell (Soprano) New York Philharmonic Leonard Bernstein (Cond.) Recording: 09/30/1961
주목 되는 사실은 바그너와 마틸데 여사가 유부남,유부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것. 얘기인 즉슨, 바그너가 빚쟁이들한테 시달리고 무슨 시국사건 수배까지 내려져 여기저기 떠돌던 고단한 시절에 스위스에서 자신의 열혈 팬이던 마여사 부부를 만났고 고맙게도 그 부부가 바그너의 후원자로 나섰는데, 마여사가 돈 많은 남편 비단 장사 베서방을 닥달해서 급기야 자신의 집 한쪽에 작은 채를 하나 지어놓고 바그너 더러 거기 얹혀 살아라고 처자식 까지 불러들인 것이다. 일설에는 궁지에 몰린 바그너가 베서방한테 기왕에 신세지는 김에 거처도 좀 마련해달라고 배짱 좋게 먼저 부탁했다고 하지만, 어찌 됐건 동기는 순수했다. 문제는 44살 바그너가 천부적인 정력절륜의 사내인데 마누라는 맨날 시름시름 아프다고 죽는 소리만 해대고 남편 일엔 도대체 돈 안 되는 짓이라고 별 관심이 없는데 비해, 마여사는 싱싱하지(29살), 이쁘지, 돈 많지, 시도 잘 쓰지, 게다가 자신의 예술세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지적이고 매력 만점의 '왕건지'였단 말쌈이다. (만사가 꼬여있는 남자가 일이 풀리려면 왕건지 하나로 순식간에 풀려버린다는 사실을 바그너는 숙지하고 있었다.)
Mathilde Wesendonck (1828-1902) 예의범절 반듯한 사대부댁 규수로 부잣집에 시집 와 살던 마여사. 한 점 그늘 없이 귀티 흐르는 그녀의 자태가 바그너가 이사 들어온 후 거울 보는 횟수가 부쩍 늘어나면서 농염하고 유혹적인 분위기까지 흐르게 되니 여자 보는 눈 있는 풍류아 바그너는 마여사를 향한 눈빛이 점차 몽롱해지면서 숫컷 기질도 함께 불끈거려 온다. 마여사 또한, 바그너에게 단순한 모성애와 예술적 관심을 넘어선 설명키 힘든 운명적인 존재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상류사회의 사교계에서 혁명적인 종합예술론과 사회개혁론을 열정적으로 부르짖던 바그너의 카리스마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자신의 운명 앞에 다가오는 느낌. 그렇다. 사랑이었다. 사랑은 거친 숨소리로 오더이다. 그해 가을, 마여사는 숱한 불면의 밤에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던 자신의 자작시 몇 편을 바그너에게 수줍게 건넨다. 그 시들에 담겨있는 스물 아홉살 한 여인의 사랑과 번뇌, 꿈과 허무와 함께 어떤 초월적인 세계를 향한 갈망. 바그너는 그 시들을 자신의 면전에서는 차마 내보일 수 없었던, 자신을 향한 그녀의 사랑의 고백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날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 지금껏 모른다. 작곡가와 여류시인이 남몰래 단 둘이 온실로 들어갔는지, 마을 예배당의 지하실로 들어갔는지, 목장의 건초 창고로 들어갔는지, 이웃마을 학교의 빈 교실로 들어갔는지. 아니면 별 일 없었는지... (나는 소망한다. 제발 별 일 있었기를.........) 그 날밤 이후, 행복한 영감에 사로잡힌 바그너는 쓰고 있던 초대형 작품, 니벨룽겐의 반지를 잠시 밀쳐두고 일필휘지로 마여사의 다섯 편의 시를 노래로 만든다. 그리고 예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착수한다. 이루지 못할 사랑, 오직 죽음으로만 완성 될 수 있는 사랑, 온통 신화적인 아름다움으로 넘쳐나는 그 러브 스토리는 어느 결에 자신이 트리스탄이고 마틸데가 이졸데로 이입되어 있었다. (후일 바그너는 고백한다. 자신에게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영감을 준 사람은 쇼펜하우어와 마틸데 베젠동크였다고.)
취리히의 베젠동크 저택. 오른쪽이 바그너가 살던 작은 채일까? 지금은 박물관이 돼있다 함 베젠동크 가곡집.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고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쓰던 중에 그들의 길지 않은 애정행각도 끝이 난다. 두 사람 때문에 가정의 평화에까지 위협을 느낀 양측 배우자의 적절한 조치로 바그너가 베니스로 떠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이 같은 울타리 안에 살았던 1년 여 동안 '결정적인 불륜'을 저질렀는지의 여부는 지금도 확실치 않아서 누구는 마여사의 정숙함과 여러 정황상 별 일 없었을 거라 하고, 누구는 코웃음 치면서 안 봐도 비디오라고 한다. 어느 매체에 실린 '간통 사라지면 예술은 없다'라는 기사를 보고 한 아낙네가 잠시 눈을 껌벅이더니 그랬다. "안 들키는 불륜이 제일 멋진 예술 아닌가?" 맞다. 둘이서 빈 교실에 숨어 쥐도 새도 모르게 저질렀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결정적 증거와 관계 없이 나는, 흐느끼는 마여사의 가슴에 주홍글씨 A를 새겨주고 나서 세상에 외치고 싶다. 여러분, 난봉꾼 바그너에게 넘어가 바람 피운 이 저속한 여인에게 나와 함께 돌팔매질을 합시다. 증거? 5곡의 가곡집과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이 여자가 낳아준 바그너의 사생아 말고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오? 주암댐 근처 폐교의 3헉년 2반 교실, 어둠침침한 장마철 교실 창가를 기어가는 달팽이 한 마리의 움직임에서 이졸데의 습기 어린 등줄기를 스쳐 내려가는 트리스탄의 느릿한, 그러나 운명처럼 뜨거운 손길이 그려지는 밤이다. 내가 달팽이가 되어 꿈을 꾸는 걸까, 아니면 달팽이가 내가 되어 꿈을 꾸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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